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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ING/영화

커피와 담배

pencilk 2006. 8. 13. 01:37


지루한 일상 속에 던지는,
커피 향처럼 달콤하고 담배 연기처럼 씁쓸한 농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풍경 속에 항상 필수 조건처럼 같이 등장하는 것이 커피와 담배다. 커피와 담배만큼 몸에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끊기 힘든 기호품도 없다. 이 중독성 강한 두 기호품은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친구인 동시에 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웰빙 바람과 함께, 오랜 ‘적과의 동침’에 마침표를 찍고 그 대신 ‘적과의 전쟁’을 선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금연빌딩이 점점 많아지고 커피 대신 녹차나 석류즙처럼 몸에 좋은 음료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공중파 TV 드라마 속에서는 멋있게 담배를 피워 무는 배우를 볼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이렇게 공공의 적으로 몰리고 있는 커피와 담배에게 그래도 우리는 좋은 친구라며 손 내미는 영화가 바로 <커피와 담배>다. 이 영화는 짐 자무시가 1986년 미국의 대표적인 코미디 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를 위해 만든 <자네 여기 웬일인가?>를 시작으로 17년간 틈틈이 찍은 단편 11개를 묶은 연작시리즈다. 이미 같은 제목의 단편 영화들을 발표했으면서도 틈틈이 촬영을 계속 해 굳이 또 <커피와 담배>라는 영화를 내놓은 것만 봐도 짐 자무시의 커피와 담배에 대한 애정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사람들은 커피에 중독되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도 연신 커피를 홀짝거리고, 담배는 몸에 해롭다는 집요한 잔소리에도 꿋꿋이 담배를 피워 문다.

영화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11가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각 이야기들은 묘하게 일맥상통한다. 카메라의 이동이 거의 없는 카페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거기에는 언제나 커피와 담배가 있다.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회색만으로 모든 것이 표현되는 흑백 화면 속에서 까만 커피와 하얀 담배연기는 체크무늬 테이블과 함께 마치 그림처럼 반복해서 등장한다. 각기 다른 단편 속에서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이 똑같은 대사를 내뱉고, 각 단편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들은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어딘가 닮아 있다.

<커피와 담배> 속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은 대화이면서도 대화가 아니다. 그들의 대화는 대화라기보다는 농담에 가깝다. 이미 담배를 끊었으니 한 대쯤 피우는 건 괜찮다는 궤변이나 처음 만난 사람의 치과 약속을 대신 가주는 이상한 친절, DJ를 오래 했더니 전기 드릴로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에는 짐 자무시 특유의 썰렁하면서도 씁쓸한 농담이 짙게 배어 있다.

배려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거나 서로의 의도가 전달되지 않아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난감하다 못해 슬퍼 보이기까지 한 사람들 사이에서 커피는 줄어들고 담배 연기는 썰렁한 공기를 흐트러뜨린다. <별 일 없어>에서 알렉스는 그저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아이작을 불러내지만, 아이작은 계속해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정말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는 알렉스와 그 말을 믿지 않는 아이작의 사이에 침묵이 흐를 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커피잔을 든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썰렁하고도 어색한 순간들은 관객들을 낄낄거리며 웃게 만든다.

영화는 또한 느리고 비생산적인 것들에 대한 미학을 담고 있다. 빠르고 생산적인 것만이 평가 받는 현대 사회에서 짐 자무시는 농담 따먹기 같은 대화를 하며 시간을 죽이는 게으른 사람들을 영화에 등장시켰다. 영화 속 사람들은 카페인과 니코틴이 얼마나 몸에 해로운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자신은 커피와 담배를 끊었다고 강조하지만, 사실은 여전히 커피와 담배를 사랑하고 있다. 유명 배우와 뮤지션이 영화 속에서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며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도 하나의 볼거리다. 펑키 락의 대부 이기 팝과 재즈 뮤지션 톰 웨이츠가 카페 내 주크박스에 서로의 노래가 없다며 유치하게 싸우는 모습이나 빌 머레이가 불량한 카페 점원이 되어 커피를 주전자째로 마시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선사한다.

눈부시게 발전한 영상 기술로 샴페인 같은 화려함을 자랑하는 요즘 영화들 속에서 <커피와 담배>는 단순 노동자들의 커피처럼 소박하고 씁쓸한 영화다. 짐 자무시가 던지는 썰렁하고 씁쓰레한 농담들은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는, 달콤하고도 중독성 강한 휴식을 선사할 것이다.


* 모 잡지사에 영화리뷰로 제출하려고 쓴 거라 문체가 이 따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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