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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비행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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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비행운』

pencilk 2013. 5. 8. 01:32
비행운
국내도서
저자 : 김애란
출판 : 문학과지성사 2012.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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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지 말자' 수없이 다짐했건만, 서윤은 경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평소 자기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유치한 질문을 했다. 

"너 나 만나서 불행했니?" 

그러곤 곧장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저쪽에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초조해진 서윤이 황급히 변명하려는 찰나 경민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 
"그런 거 아니었어." 
"......"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 

 

2.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3.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
불과 이틀 전에 '뭐라도 되겠지' 하는 책을 읽어놓고 그 다음으로 선택한 책이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라는 문장으로 가슴을 후벼파는 책이라니, 두 책의 간극이 너무 커 조금 얼떨떨하고 멍한 상태로 책을 읽었다. 사실 비행운을 읽는 동안 때로는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때로는 다음 문장을 읽기가 두렵기도 했다. 빨리 읽어치우고 싶은 마음과 여기서 읽기를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 그 두 마음의 치열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신기한 것은 읽는 내내 힘들었던 글이었으나 속도가 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정말 빠른 속도로 읽어버렸다는 점. 아무튼 다 읽고 나니 불현듯 김애란이 왜 문단의 여동생인지 알 것 같았다. 1980년생. 겨우 나보다 2살 많은데 어떻게 이런 삶을, 이런 생활을 알까. 어떻게 이런 인생들을 글로 쓸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들이 제일 먼저 들었으니까. 김애란에게는 흔히 말하는 '요즘 젋은 작가들'에게는 절대 없는 정서가 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88만원 세대의 아픔을 이야기할 때 김애란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보면 '옛날 작가들'이 많이 써서 지루한 소재들이다. 그런데 그 방식은 '옛날 스타일'이 아니다. 이러니 문단의 선배들에게 어찌 사랑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문단의 '여동생'이라는 표현 자체가 '선배'들의 사랑을 받았기에 가능한 거다.) 선배들 입장에서야 여동생이었겠지만, 사실 김애란은 징검다리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다리의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필요로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