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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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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pencilk 2013. 4. 11. 06:15

김환기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작년이었나. 갤러리 현대에 우연히 김환기전을 보러 가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그림을 보고 한눈에 반했달까. 솔직히 국내 작가의 그림을 보고 그렇게 좋았던 건 처음이었다.

언젠가부터 알든 모르든 상관 없이 의식적으로 전시회를 많이 다니는 편이다. 당연히 그 전시회들을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 모든 전시회가 다 너무 좋았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별로면 별로인 대로, 이해가 안 가면 이해가 안 가는 대로 그냥 계속 보러 간다. 그래서 여름 휴가로 유럽에 가서도 주구장창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2010년 파리, 2011년 런던, 2012년 피렌체, 2013년 다시 파리, 무려 4년 연속으로 유럽에 가면서 웬만한 미술관은 다 가본듯. 특히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올해 3월 말 파리행에서는 가히 그 정점을 찍었다. 나의 엄청난 미술관 관람 계획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물론 계획대로 날짜 맞춰서 가지도 않았고 저 미술관들을 전부 다 가지도 않았음) 열흘 동안 15개 정도의 미술관에 갔다. 하루라도 미술관에 안 간 날이 거의 없고 하루에 최고 3군데까지 갔다는. 내가 생각해도 대다나다. 근데 올해 3월의 파리는 너무 추워서 어디든 들어가 있을 곳이 필요했고 또 중간에 친구 만나는 일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혼자 하는 여행이었기에 미술관이 절실하긴 했다.


아무튼 그 짓을 몇 년째 하다 보니, 이번에 파리에서 미술관을 다니면서 문득 그래도 예전보다는 좀 덜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딱히 내가 그림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몇 년 전보다는 좀 더 편안했달까. 몇 년 전에 뭣 모르고 갔던 전시회의 작가가 몇 년 후에 간 다른 전시회에서 언급되거나 할 때 (쿠사마 야요이가 그랬고 서도호가 그랬다.) 느꼈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국내의 전시회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한 지는 1-2년밖에 안 된다. 그 전에는 유럽 여행을 가서 다닌 미술관들에 비하면 국내에 있는 동안 간 전시회 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서 당연히 국내 작가들은 전혀 몰랐다.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학교 다니는 동안 내가 미술 교과서에서 배운 그림들은 죄다 외국 작가들이었다. 르네상스, 인상주의, 입체파, 다다이즘 등등. 이름만 대면 우와- 하는 화가들은 모네, 마네, 피카소, 마그리트, 샤갈, 마티스 뭐 그런 작가들 아닌가. 한국 화가 중에 그런 화가는 김홍도와 신윤복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에서야 겨우) 김환기를 알게 된 것이다. 김환기는 한국미술계의 아방가르드와 추상미술의 선두주자라고 하는데, 과연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한국 화가의 그림들과는 달랐다. 이런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몰랐다는 게 애통할 정도. 김환기가 파리에서 머물던 시절에 그린 산, 강, 보름달, 매화, 백자 등의 이미지들은 단순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느낌을 주는 푸른 색감을 보여주는데, 차가운 색에 속하는 블루가 따뜻한 느낌을 준다는 표현이 모순처럼 들릴 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표현하는 한국의 '푸른靑 빛깔'이 서양의 '블루Blue'와 다르다고 강조했던 김환기의 세계가 그렇게 표현된 거라고 생각한다. 내게 푸른 색감의 작가 하면 서양에서는 샤갈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샤갈의 블루와 김환기의 푸른 빛깔은 다르다.

기하학적인 점과 선으로 만들어내는 공간과 여백을 통해 밀도 높은 추상화면을 완성해낸 '우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의 작품 앞에 섰을 때, 나는 김훈의 문장 앞에서 느끼곤 했던 무참함으로 발 밑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작년에 처음 그의 뉴욕시기 그림들을 봤을 때, 정말 한참동안 걸음을 떼지 못하고 오래오래 그림을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림의 제목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환기의 절친한 벗이었던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구절에서 붙인 거라고 한다. 오랜만에 그의 시를 찾아서 읽는데, 눈 앞에는 김환기의 그림이 떠올랐고, 그리고 또 다시 마음의 끄트머리에서 무언가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살아오는 동안 언제 어딘가에서 내가 놓친 것들, 내가 잊어버린 기억들이 문득 마음의 수면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서서히 가라앉았다.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