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cilk

[인물탐구] 노암 촘스키 (Noam Chomsky) 본문

WRITING/DEW 기사

[인물탐구] 노암 촘스키 (Noam Chomsky)

pencilk 2002. 10. 1. 11:06

미국의 유력 신문인 <시카고 트리뷴>은 노암 촘스키(75)를 인류 역사상 가장 자주 인용되는 여덟 번째 인물로 묘사했다. 인문·예술분야 인용지수(AHCI)에 의하면 1980년부터 92년 사이 그는 각종 인문·예술분야에서 무려 4,000회나 인용되었다. 노암 촘스키는 플라톤, 셰익스피어, 프로이트 등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학자이다.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학사, 석사를 마친 그는 1955년 ‘변형’이란 개념을 도입해 ‘통사구조(Syntactic Structures)’로 언어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1961년에 같은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고, 현재 언어학 석좌교수로 있다. 저명한 소설가 노먼 메일러는 촘스키에 대해 “야위고 날카로운 얼굴에 수도사 같은 인상을 지녔고, 부드럽지만 완벽한 도덕성이 느껴지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비평가 로버트 바스키는 그에 대해 ‘촘스키는 금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우리 시대에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모차르트 또는 피카소가 있다면, 미래에는 촘스키가 있을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하기도 했다.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

1928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유태계 러시아 이민 2세로 태어난 촘스키는 어렸을 때부터 언어와 언어학에 관심이 많았다. 이는 저명한 히브리 언어학자였던 아버지 윌리엄의 영향력 덕분이다. 그는 10살 때부터 아버지의 박사학위 논문과 여러 글들을 읽으며 유태 문화와 언어학 연구의 기본적인 태도를 배웠다.

인간의 언어습득이 훈련에 따른 행위일 뿐이라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촘스키는 '언어 생득설'을 주장했다. '언어 생득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언어능력을 갖는다는 가설로 성인과 어린아이의 언어 습득 모습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성인은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도 잘 안 되는데 반해, 어린 아이는 의식적 노력이나 훈련 없이도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많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으며 20세기 후반을 장식했다

촘스키 언어학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사물을 보는 그의 자세다. 그는 가장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상도 쉽게 지나치지 않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이러한 감수성을 언어 뿐 아니라 우리의 주변, 즉 언론매체, 정부정책, 사회현상에도 기울였다. 실제 촘스키는 주전공인 언어학뿐만 아니라 철학, 국제 문제, 미국 해외정책 등에 대한 70여권의 저서와 1천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많은 강연을 한다. 그는 분명 위대한 언어학자지만 최근 들어서 철학자, 정치비평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정치 비평가로서의 면모

촘스키는 유년 시절에 학년이나 성적의 구분이 없는 진보적인 대안학교를 다니면서 일찍이 비판 정신에 눈을 떴다. 1950년대에는 아내와 함께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여기서 자유주의 정신을 체득한 그는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하며 본격적으로 현실 비판에 뛰어든다.

1966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지식인의 책임'이라는 글은 촘스키를 비판적 지식인으로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는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세상에 알려야 하며, 정부의 명분과 동기 이면에 감추어진 의도를 파악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촘스키는 그 이후에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해왔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1996)』,『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1999)』,『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2000)』등의 저서는 미국 정부, 지식인, 대자본가들의 야합과 음모가 어떻게 제3세계의 민중들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지 폭로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과 우리의 5·18 광주민중항쟁, 라틴아메리카의 크고 작은 분쟁 개입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전 세계 지식인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는 미국이 겉으로는 세계평화와 국제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유엔의 결의안, 세계인권선언, 국제법 등을 무시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군사적 힘과 경제적 제재를 폭력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촘스키는 그런 미국이야말로 '불량국가'라고 주장했다.(『불량국갱, 2001) 그래서 그는 미국인이면서도 미국의 패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지식인으로서, '미국의 양심', '미국의 골치 덩어리'라는 극단적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는 가난한 자로부터 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 촘스키의 생각이다. 그는 노동의 이동을 막고 자본의 이동은 허용한 결과 세계적 경제 혼란이 초래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초국적 기업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자간 투자협정과 같은 음모들이 아직도 진행 중이므로 끊임없이 경계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원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적용될 뿐 초국적 기업은 그 원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부유한 특권층은 공적 자금의 지원을 받고, 그에 따른 비용과 위험 부담은 모두 사회로 이전된다. ……IMF는 외환위기에 처한 나라들을 구제한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투자가들을 구제한 것이고, 해당 국가의 국민에게 극심한 비용을 전가함으로써 은행가와 투자가들만 이익을 보게 했다. ……결국 경제 세계화는 국민 대다수가 소수 특권층의 부를 위해 일하는 이중의 사회 구조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ㅡ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2001)』중에서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촘스키는 여러 저서들과 강연을 통해 미국의 대외 정책과 국내 정책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미국 언론의 태도라고 말한다. 그는 저서『프로파간다와 여론(2002) 』를 통해 미국의 언론들은 여론을 조작하고 미국의 이익에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정확히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언론이 하나의 이데올로기 조작 도구 역할을 하여 대중의 의식과 생각을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한다는 말이다.

1975년 인도네시아군은 포드 정권의 암묵적 동의 아래 동티모르를 점령하여 무자비한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하지만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바로 그 언론은 월맹군의 캄보디아 학살이나 십여 년 후에 일어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해서는 엄청난 양의 보도를 해댔다. 이는 미국 석유회사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촘스키의 주장이다. 세계 지식인 사회와 영향력 있는 언론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은폐했을 때, 촘스키는 동티모르의 인권과 독립을 위해 일관되게 투쟁했다. 또한 미국의 약소국에 대한 개입 정책에 관해서도 침묵하지 않았다.

이후 <뉴욕 타임스> 등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그를 기피했다. 그런 까닭인지 촘스키는 미국보다 외국에서 더욱 유명하다고 한다. 또한 미국에서도, 언론에서는 주목하지 않지만, 대학 캠퍼스에서 그는 우상이다. 촘스키는 가는 곳마다 청중을 몰고 다닌다. 많은 사람들이 촘스키에게 강연을 요청하기 때문에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는 몇 해 전에 미리 예약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시대에 살아있는 가장 소중한 지식인'

그의 비판은 언제나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인류의 정의라는 한 가지 기준 하에서 사실만을 폭로한다. 때문에 이 쪽, 저 쪽으로 구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는 여러가지 별명을 얻었다. 상반되는 진영으로부터 유태주의자로, 반유태주의자로 불리는가 하면, 친나치주의자로, 반나치주의자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 주의자도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는 다만 모든 형태의 억압에 반대하는 반억압주의자일 뿐이다.

촘스키는 지칠 줄 모르는 끈기를 갖고 있다. 그는 정치 문제와 언어학에 대한 글들을 꾸준히 쓰면서도 수없이 많은 강연을 하고 있다. 촘스키에게 가장 비판을 많이 받았던 <뉴욕 타임스>도 그를 "이 시대에 살아있는 가장 소중한 지식인"이며 "국민의식을 쉴새없이 일깨워주는 행동주의자"라 평가했다.

그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진실을 폭로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이해하도록 도울 뿐이다. "이제 이 세계에 더 이상 희망은 없다고 당신이 생각한다면 당신은 정말로 희망이 없는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이 자유에 대한 본능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현실을 변화시킬 기회를 갖게 될 것이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당신이다." (『불량국갱, 2001) 그는 우리들을 돕기 위해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다. 우리에게는 이제 선택하는 일만이 남아있다.

 

 

키부츠 : 이스라엘의 집단농장의 한 형태. 철저한 자치조직에 기초를 둔 생활공동체이다. 1909년 어려운 시오니즘운동 중에서 최초의 키부츠가 탄생했다. 키부츠 구성원은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고 토지는 국유(國有), 생산 및 생활재(生活財)는 공동소유로, 구성원의 전 수입은 키부츠에 귀속된다. 아랍과 긴장 관계 하에서 민병적(民兵的)인 군사적 의의를 가진다.




웹진 듀 2002년 10월호 기사
http://ewhad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