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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전혜린

pencilk 2002. 11. 1. 11:13

도서관에서 빌린 85년도 중판 전혜린의 유고집 <이 모든 괴로움을 다시>는 거쳐온 세월의 길이를 보여주듯 많이 낡고 손때가 잔뜩 묻어있었다. 여기저기에 그녀의 생각에 대한 공감, 또는 의문을 표한 글씨들이 적혀있다. 어떤 문장에는 줄이 몇 번씩 그어져 있고, 여백에는 누군가가 써놓은 글이 보인다. "이 문장에 공감한 누군가가 보라색 펜으로 줄을 그었다. 나와 공감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외롭지 않게 한다." 그녀의 생각에 공감한 수많은 이들의 흔적이 책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전혜린은 시인도, 소설가도, 그렇다고 평론가도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우리나라에 헤르만 해세를 비롯한 독일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번역가 정도다. 번역이 아닌 자신의 글이라고는 사후에 출판된,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하인리히의 뵐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산문집, 그리고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제목으로 묶인 일기가 전부다. 이 책들은 출판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당시 20대의 젊은 층, 특히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서독에서 학위를 받은 한 법철학박사는, 독일에서 만나본 재독 한국 간호원들의 대부분이 "전혜린 씨의 글을 읽고 뮌헨을 동경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독일로 오게 되었다"고 말해 놀랐다고 한다. 이는 그녀의 글이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환상과 꿈에 살며 순수와 자유를 지향하는 젊은 지성층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글에 드러나는 앞날에 대한 절대적인 불안과 절망의 요소들이 이들과 강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평범한 것을 증오한다"

전혜린은 1934년 1월 1일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29세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 행정 두 과에 합격한, 천재 소리를 듣던 전봉덕 씨와 김순해 여사와의 8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오로지 하고 싶은 공부만 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을 서울과 신의주에서 보냈으며, 1946년 경기여중에 입학하여 중, 고등학교 시절을 서울과 부산에서 보냈다.

전혜린의 아버지는 그녀가 서너 살 때부터 한글책과 일어책을 전부 읽을 수 있도록 직접 가르쳤다. 그는 딸이 공부 이외의 일을 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아버지가 사다주는 책을 읽는 게 그녀의 유년 시절의 전부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 된다"고 맹세했다. 여학교 시절부터 사회에 나와서까지 전혜린과 둘도 없는 친구였던 전 동아방송 PD 배동순씨는, "그녀가 분명 타고난 재능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 비범해야만 되겠다는 무서운 의지와 노력이 어렸을 적부터 있었다"고 말한다.

경기여중ㆍ고를 졸업한 그녀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공립 학교만을 다니며 관료적 교육을 받은 그녀의 가슴속에는 자유로운 학문에 대한 갈망이 커가고 있었다.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입학한 법과대학에서 권태를 느낀 그녀는 마침내 1955년 가을,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유학을 떠난다.


낯섦으로의 도피, 그 '출발을 위한 출발'

독일 유학은 당시 한국 여성으로서는 선구적이었다. 그녀는 뮌헨 대학에서 5년 간 공부하면서 그릴파르쩌를 비롯한 독일 문학과 철학, 특히 니체를 연구했다. 뮌헨의 슈바빙, '내리깔리는 축축한 안개 사이로 오렌지색 가스등이 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그 곳'은 곧 전혜린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극단적인 빈곤을 감수하고 정신 추구와 물질 경멸의 자세가 몸에 배인 슈바빙의 스토이즘(Stoicism)은 부유한 환경에서도 정신만을 중요시하던 그녀에게 쉽게 스며들었다.

독일 유학 시절은 그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 볼 수 있다. 독일로의 출발은 그녀의 삶에 커다란 분계선이 된 생 자체의 새 출발이었다. 전혜린은 뮌헨에 도착한 첫해에 카톨릭에 입교했고 이듬해에는 결혼했으며, 독일에 있었던 마지막 해에는 딸 정화를 가졌다. 사실 그녀는 중학교 때부터 독신주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대에 갔고 결혼도 한 것으로 보아, 반항적이었던 내면과 달리 현실에서의 그녀는 순응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는 내내 그녀의 정신을 괴롭혔고 삶에 대한 회의와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했다. 임신 중의 그녀의 일기는 불안과 공포, 삶에 대한 회의와 죽음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있다.


생(生)이란 살아질, 지켜나갈 만한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어떠한 권리로 나는 하나의 생명을 세상으로 보내는가? 십 년 후에는 나와 꼭 같이 그것은 무로 되돌아갈 것이다.……(중략) 나는 지금 죽든, 20년 후에 죽든 꼭 마찬가지다. 영원한 침묵을 지키는 시공(時空)에 비교하면 모든 것은 그렇게도 헛된 일이다. 요컨대 인간의 생은 추구할 만한 게 못 된다. 가깝든 멀든 미래에는 죽음이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행동하고 있다. 그것을 회피하고 있다. 모든 것, 모든 다른 것은 끔찍이도 생각하지만 죽음만은 조금도 생각하질 않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인간에게는 터부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서는 미쳐버릴 것이기 때문에…….

                                                                                 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중에서

이렇게 괴로워하는 가운데도 시간은 흘러 마침내 출산일이 닥쳐왔고, 전혜린은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의 나이 25세였다. 하지만 그렇게도 세상에 내보내기를 두려워하고 주저했던 새로운 생명인 정화는 그녀의 생각을 바꾸어놓았다. 몇 번이고 죽음에의 유혹에 흔들려 자살 기도를 한 적도 있었던 그녀에게 정화는 신이 주신 선물이었고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59년 4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다음 해에 모교인 서울법대 교양학부에 강사로 출강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 다음해부터는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에도 나갔지만 1964년이 되어서야 시간 강사를 벗어나 성균관대 조교수가 되었다. 대학 교수라는 직업은 그녀의 천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교수라는 직업을 혐오했다. 어릴 때부터 전혜린은 작가가 되고 싶었다. 독일 유학 시절 일기에서 그녀는, "일생에 한 번, 한 개라도 좋은 작품을 쓰고 싶었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나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65년 1월 10일.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어느 정도 신비화시켰고 숱한 추측을 낳게 만들었다. 전혜린의 사망 원인은 공식적으로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밝혀놓은 유서를 남기지 않은 이상, 그녀가 '죽기 위해서' 수면제를 삼켰는지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자살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그녀가 반생 밖에 살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그녀의 더 많은 글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비극일 뿐이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그녀는 '권태'와 '광기'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렸다. 그녀가 그렇게도 증오하고 거부했던 '권태로움'을 광기로써 극복하려 했다. 그녀는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고 생을 사랑했다.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수없이 좌절하여 허무의 나락에 빠져들었고, 또 수없이 다시 일어서고 생에 매달렸다.

일기에도 있듯이 그녀는 니체의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를 온몸으로 느꼈다. 온갖 싫은 일들, 너저분하고 후진 일들, 시시하고 따분한 일들이 깔려있는 운명의 아스팔트지만 이 길이 끝이 안 났으면 하는, 또는 또 한 번, 하는 의욕은 실로 무섭고 기름진 삶의 욕구의 사고이다.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도 몇 번이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며 이 괴로운 생의 아스팔트 위를 걷고 또 걸었다.

그녀는 항상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완벽한 순간들을 그리워했다. "노을이 새빨갛게 타는 내 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 광경이 아름다워서였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은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완전한 환희나 절망, 무엇이든지 잡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완벽하고자 했고 평범하고 비천한 것을 증오했다. 무엇인가 뛰어난 것을 자신에게 만들어내어 무명(無名)으로 남지 않는 것이 그녀의 온 관심사였다. 그렇게 그녀는 쉼 없이 생을,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다가 갔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행복하기를 거부했다. 그 여자는 짧은 생애를 가득한 긴장 속에서 살기 위하여 끊임없는 욕망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누구보다도 가난했다. 그는 하나의 활화산이었다. 이 지상에 살고 간 서른 두 해, 자기의 생을 완전하게 산 여자였다. 가짜가 아닌 생이었다. 생을 열심히 진지하게 살았다. 정말로 유일한 여자였다. 그는 오늘의 침묵에 이르기 위하여 언제나 말을 했고 언제나 노상(路上)에 있었다. 당신은 이제 알 것이다. 그가 도달한 침묵의 값을..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이어령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에서




웹진 듀 2002년 11월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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