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cilk

[인물탐구]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본문

WRITING/DEW 기사

[인물탐구]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pencilk 2003. 3. 1. 21:29

“평생의 저작 활동을 통해서 보면, 그는 도덕주의자라기 보다는 인류에 대한 책임감에 압도되어 있는 예술가였다.“ 알베르 카뮈에 대한 호치슨(Hutchin)의 평가다. 알베르 카뮈는 1957년 10월 17일 프랑스인으로서는 9번째, 최연소의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 위원회는 그에게 상을 수여하면서 그의 작품들이 ”인간 의식에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빛을 던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카뮈의 작품들에 드러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허무주의와 그것의 극복 과정은 결국 그의 삶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가 있기까지

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알제리의 작은 도시 몽도비(Mondovi)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마른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귀머거리인 그의 어머니는 외할머니, 외삼촌과 함께 알제리의 노동 계급이 모여 사는 빈민굴 벨쿠르(Belcourt)로 이사했고 카뮈는 빈곤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어린시절과 그가 태어난 알제리라는 장소는 후에 카뮈의 여러 작품에 여러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중요한 소설은 모두 조국 알제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카뮈가 태어났을 당시, 알제리는 공식적으론 프랑스의 세 개의 주 중 하나이자 프랑스의 식민지에 속했다. 1913년에 알제리에서는 프랑스 본토와의 통합, 즉 알제리 민족의 프랑스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가난한 노동계급에 속했던 그는 강경한 식민주의자와 평범한 시민들을 구별할 줄 알았다. 그의 이웃들은 낮은 임금을 받고 기술공, 또는 공장 직공으로 일하는 프랑스계 알제리인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후에 카뮈의 단편 『침묵하는 사람들』에 등장한다. 또한 카뮈가 처음으로 발표한 수필집 『표리, 1937』는 그의 어둡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묘사하고 있다.

1918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카뮈는 L.제르맹이라는 교사를 만나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는 카뮈가 알제 리세(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후에 카뮈는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그 영광을 제르맹에게 돌리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카뮈는 알제대학교에서 철학 교수 J.그르니에를 만나 문학과 철학에 입문한다. 카뮈는 그르니에와 함께 문학, 철학뿐만 아니라 축구 등 운동도 함께 즐기고, 그를 평생 스승으로 모시며 존경한다. 두 스승은 카뮈의 지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연극인, 언론인으로서의 활동

1930년대에 카뮈는 관심의 범위를 넓혔다. 그는 앙드레 지드, 몽테를랑, 앙드레 말로의 작품 등 프랑스 고전문학을 섭렵했으며, 좌파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1934~35년에는 잠깐 알제리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카뮈는 대학 시절부터 연극에도 관심이 많았다. 노동 계급의 사람들에게 연극을 보여주기 위해 '노동 극단'(후에 ‘동료 극단‘으로 개칭)을 조직한 그는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과 각색 및 연기까지 맡았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앙드레 지드, 빌드락 등의 작품을 번안, 각색하여 상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앓아온 폐결핵의 재발로 교수자격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카뮈는 교수가 될 것을 단념하고 기자가 되었다. 반식민주의 신문 <알제 레퓌블리캥 Alger-Republicain>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사르트르의 초기 작품 몇 편의 서평을 썼고, 카빌리아 지역의 이슬람교도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논설을 썼다. 이 논설은 알제리 전쟁으로 빚어진 수많은 부조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야기했다. 카뮈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입장보다 인도주의적 입장에 서 있었다. 이후에도 언론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한 그는,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관지였다가 나중에는 일간지로 발간된 지하 신문 <콩바>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정의와 진리 및 모든 정치활동은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카뮈의 기본 신념이었다.


작품 속의 카뮈

그러나 좌파와 우파의 구태의연한 편의주의에 점점 환멸을 느낀 카뮈는, 1947년에 <콩바>의 편집장 자리를 내놓았다. 이 무렵 카뮈는 전쟁 중에 출판한 그의 주요 작품들로 이미 프랑스 문단의 주요 인물이 되어있었다. 그의 첫 번째 단편 소설 『이방인, 1942』은 소외된 한 사람의 이방인으로 전락한 인물을 그려냄으로써, ‘인간소외’라는 20세기의 주요한 테마 하나를 인상적으로 제시했다. 같은 해에 발표한 『시지프의 신화, 1942』는 카뮈가 당시의 허무주의와 ‘부조리’ 의식에 대한 공감을 가지고 이를 분석한 철학 평론이다. 그의 첫 번째 장편 소설 『페스트, 1947』는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전염병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카뮈는 각 인물의 독특한 개성을 통해 그들의 공포심과 의식 혼란, 사랑했던 것들과 외부세계로부터의 고립,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휴머니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20세기 인간의 현존의 의미를 부조리라는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려 했다. 인간의 삶은 죽음에 직면하면 궁극적으로 무의미해지며, 각 개인의 경험은 합리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 이론이다. 카뮈의 전 작품은 부조리와 무의미함에 대한 뜨거운 성찰이며 반항이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조리’를 얘기했던 그의 작품들은 차차 도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반항'으로 소재를 옮겨갔다. 그는 장편 평론 『반항적 인간, 1951』에서 정치적․역사적 혁명을 반항이라는 개념과 대비했다. 이 평론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은 물론 사르트르 같은 친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전락, 1956』과 단편집 『유배와 왕국, 1957』 등이 있다.


부조리와 무의미의 너머에 있는 것은

철학자라기보다는 사색적인 수필가에 더 가까웠던 카뮈는 1957년 44세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이 채 안 된 1960년 1년 4일 몽몽트로 근교 빌블르뱅에서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카뮈의 대표작인 『이방인』에서, 뫼르소라는 인물은 다른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는다. 뫼르소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된 것은 실제로 삶과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위험한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무의미가 결코 절망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이 표현한 것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무의미함과 삶의 유한성, 가난한 사람들의 삶,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 등 비참한 것들에 대한 부정이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부조리에 대한 부정과 허무주의에 빠져버리면 삶은 정말 무의미해진다. 카뮈가 그의 글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러한 부조리에 대한 부정을 뛰어넘어 그 부조리의 너머에 있는 삶에 대한 희망이 아니었을까.

"그가 2년 동안 존재했건 20년 동안 존재했건 뭐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행복이란 그가 현재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인 것이다."

                                                                                          - 알베르 카뮈 『행복한 죽음』 중에서





웹진 듀 2003년 3월호 기사
http://ewhadew.com/news/articleView.html?idxno=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