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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이오덕

pencilk 2003. 10. 1. 22:40

'부고를 알리지 말고 장례식이 끝난 후에 즐겁게 돌아갔다고 전하라.' 지난 8월 25일 향년 78세의 나이로 별세한 이오덕씨의 장례는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어떤 조화와 조문도 받지 말라는 고인의 유언대로 각계에서 보내온 조화들은 빈소 밖에 놓였고, 조문객들은 빈소 참배도 못하고 밖에서 서성여야 했다. 살아온 내내 그러했듯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청빈을 실천하려 한 고인의 모습이었다.

1925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난 이오덕씨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의 농촌 현실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더 이상 진학을 할 수 없었고, 2년 간 농사를 짓다가 돈이 안 드는 2년제 농업학교에 들어갔다. 봄, 여름, 가을에는 밭 매고 채소 가꾸고, 비가 오면 교실에서 공부했다. 그 곳에서 그는 '땀흘리며 일하는 것과 밥을 해서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배웠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받기 어려운 참교육이었다.


참교육으로 가는 길

졸업 후 영덕군청에 사무원으로 취직했던 이오덕씨는 1944년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교육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교육을 통해 무엇보다 '일하는 아이들'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학원에 다니고 과외를 받으면서 온갖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ㅡ그가 농업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ㅡ 스스로 현실 속에서 즐겁게 놀면서 자기 삶을 사랑하고 가꾸는 '일하는 아이들'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87년의 전국교사협의회,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설립 운동, 교육·학교 민주화 운동 등 현장에서 벌어진 민주교육 운동에 이오덕씨가 미친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 교육자'라는 말에 반박했다. 참교육을 하려면 아이들이 즐겁게 일(놀이)을 하도록 해야 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아이들과 같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사는 기본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다만, 교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저서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삶과 믿음의 교실>, <이땅에 살아갈 아이들 위해>는 그가 잘못된 교육풍토를 바로잡으려 고민한 흔적이다.


어린이를 위한 글은 정직해야 한다

1955년에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면서 아동문학가로 등단한 이오덕씨는 71년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신촌문예에 각각 동화와 수필이 당선되었다. 이렇게 아동문학을 하고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우리나라 아동문학에 대한 걱정의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아동문학', '동시' 하면 그저 '꽃밭', '나비', '옹달샘' 등의 삶과 동떨어진 예쁘고 고운 말을 떠올리고, 그것이 어린이들을 위한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동심주의'를 나무랐다. '어린이의 세계와 삶 속'에 들어가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어린이들이 어른 흉내를 내기 전에, 느낀 그대로 멋 부리지 않고 솔직하게 쓰는 데서 참된 글이 쏟아져 나온다고 믿었다. 예쁘고 고운 것만 바라보도록 하지 않고, '진짜 삶'을 말하도록 했다. 그렇게 어린이들의 글을 모아서 만든 작품집이 <일하는 아이들>과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이다. 이 책이 나오자 어린이가 쓴 것이 아닐 거라고 쑥덕거리는 목소리도 있었다. 아무런 기교도 없이 솔직하게 쓴 것 하나만으로도 어린이들의 글은 어떤 어른들도 흉내낼 수 없는 살아있는 글이었다.


우리말 살리기

아이들을 가르친 지 10여 년이 지났을 때, 그는 우리말이 일본말, 서양말과 뒤섞이면서 잔뜩 일그러진 채 바르게 쓰여지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의 우리말 살리기 운동과 글쓰기 교육의 시작이었다.

일제 식민기를 거치면서 겨레말이 망가졌고 이후 외국어의 잘못된 칩임으로 우리말이 크게 훼손됐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일명 지식인들의 '유식병'이었다. '…했었었다'라는 식의 영어에나 있는 과거완료 시제의 번역투 문장이 널리 사용되고, 불필요한 수동형의 문장이 난무했다. '몫'을 '지분'으로, '처지'를 '입장'으로, 불필요하게 어려운 한자를 사용하고, '그런데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일본어 표현으로 쓰고 있다. 이오덕씨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쓰면 지식인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때문에 외국어 앞에서 우리말이 퇴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 지식인들이 서구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야 우리말글이 살아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오덕씨는 42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86년 2월 5공화국 정권이 "하도 발악을 하고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까 그만 몸서리가 나서"(<한겨레> 2003년 5월27일치 35면) 스스로 교직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의 ‘우리 말 사랑’은 중단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사회가 커다란 교실이었고, 그는 제 말글을 제대로 살려 쓰지 못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사회의 교사'로 나섰다. 1983년에는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창설했고 '우리 문장 쓰기', '우리 글 바로 쓰기' 등의 집필과 공동대표를 지냈다. 또한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 등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말의 오용을 질책하고 한글 전용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2년 정부는 이오덕씨의 평생에 걸쳐 벌인 우리말 운동의 뜻을 받들어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즐겁게 돌아갔다

이오덕씨는 한 평생 아동문학과 글 쓰기 교육, 우리말 살리기에 힘썼다. 별세하기 며칠 전 그가 병실에서 쓴 시는 마지막 가는 길에 남긴 '즐겁게 돌아갔다'는 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그 누구보다 우리말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던 그는 아마도 이 세상에 한 점 미련이나 후회 없이 '즐겁게 돌아갔'으리라.

 

빛과 노래

한 달 동안 병원에서
밤낮 노래를 들었다.
며칠 뒤에는 고든밭골 병실로 옮겨
햇빛 환한 침대에 누워
새소리 바람소리 벌레소리를 듣는다.
아 내가 멀지 않아 돌아갈 내 본향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는 곳
내 어릴 적 동무들 자라나서 사귄 벗들
모두모두 기다리는 그 곳
빛과 노래 가득한 그 곳
그리고 보니 나는 벌써
그곳에 와 있는 것 아닌가
그곳에 반쯤 온 것 아닌가
나는 가네 빛을 보고 노래에 실려

- 8월 19일 아침, 이오덕씨가 쓴 시





웹진 듀 2003년 10월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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