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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졌으나 지워지지는 않는. 본문
고등학교 때 쓰던 교환일기장을 찾았다.
이승환의 '다만'을 들으면서 떠올렸던 그 친구와 주고받았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이 우리의 마지막일 거야'라고 생각한 사람은 누구도 없었기에, 각자가 들고 있는 교환일기는 자신의 것이 아닌 서로의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것도 그애가 나에게 쓴 것이 아니라 내가 그애에게 쓴 것이다.
교환일기가 끝난 곳에 멈춰서 멈칫했다.
우리가 이랬었구나. 가물가물하다.
고 3 때 시작됐던 일기는 재수하면서까지 이어져 있었다. 재수하면서도 만났던 기억은 났지만 거의 만나지 못해서 일기에 그 날 그 날 공부한 것들을 적어나가기로 했었다는 것은 잊어버렸었다. 일기는 뒤로 갈 수록 이야기보다는 공부한 것들의 체크 리스트가 더 많아지고, 2000년 9월 20일을 끝으로 멈춰있다. 이후엔 수능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걸까.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일기장은 내가 그 애에게 쓰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애의 흔적은 거의 없다. 딱 하나 그 애가 내가 쓴 일기 뒤에 써놓은 글이 있는데, 99년 9월 28일, 그러니까 918 열흘 후 겨우 정신차리고 쓴 내 글 뒤에 적혀있었다.
다시 읽으면서 사실 참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목숨을 걸었던 일들, 그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끼고 상처받았던 일들에 이제 나는 그 때만큼 힘들어하지도, 상처받지도 않을 거다. 그리고, 저런 말을 들어본 적도 그 때밖에 없었고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기의 첫장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참, 너가 얘기한 거 있잖아. 우리 지나다닐 때 인사 안 하고 지나가고 그러는 거.. 나도 사실은 어색했는데.^^; 난 니가 전에 주리랑도 마주쳐도 인사 안 하고 개무시(그 때 네 표현 그대로.^^)하고 지나간다 그랬던 게 생각나서 일부러 인사 안 한 거였는데.. 그게 아니라니 이제부터는 마주치면 니 말대로 씨이익-하고 웃으면서도 인사도 하고 장난도 치고 그러자. 우리는 좀 신기한(?) 사이잖아. -_-; 뭔가 조심스럽고 어색한... --;; 이제부터는 정말 편하게 가족같은 그런 친구가 됐음 좋겠다."
내 기억엔 우리는 끝까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 애는 유난히 친구들과 장난을 많이 치는 스타일이었는데, 나는 그 애와 장난을 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리고 아직도 뚜렷이 기억나는데, 나는 그 애와 분명 많이 친했는데 그런데도 늘 무언가 편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생각이 나면 한번씩, 그렇게 채워나가면 몇 년 안에 이 일기장을 다 채울 수 있을까.
만나서 전해줄 자신이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생길지 모르겠다. 그 때 우리가 함께 울었던 공통분모가 그 애에게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 애는 아직도 그 때처럼일까, 아니면 나처럼 변했을까. 만약에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이제 정말 편한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평범한 친구들이 나누는 그런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묻어두었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을 기억.
가끔 생각이 나면 끄적거려 보려 한다.
전해주지 못해도 상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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