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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THINKING/책, 글 (129)
pencilk
여행할 권리 국내도서 저자 : 김연수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08.05.13 상세보기 1.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친해진 나는 그에게 명함을 주면서 내가 사는 곳은 한국어로는 일산(一山)이니 일본어로는 '이찌야마'인데, 그걸 독일어로 바꾸면 '아인베르크'가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길가다가 만난 일본인에게 어찌 그런 너스레를 떨 수 있었겠느냐마는 그게 다 외로움 때문이었다. 외로움은 맷돼지처럼 힘이 세다. 꼼짝 못한다. 2. 후사꼬 할머니는 버클리는 참으로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날씨도 좋고, 자유롭고, 여유로운 곳. 내게 버클리에 살면서 글을 쓰라고 권유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주 긍정하는 말은 아니고 적당히 맞장구치는 말을 했더니 후사꼬 할머니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
사월의 미, 칠월의 솔 국내도서 저자 : 김연수 출판 : 문학동네 2013.11.20 상세보기 1.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미경이 진짜 닥터 강을 늑대라고 믿고 있다는 걸 알고는 여동생의 과학 상식이 그토록 부족하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그런 과거가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열 살 언저리에는 레테의 강처럼 망각의 심연이 존재하는 것인지, 나중에 미경은 그런 꿈을 꿨다는 사실도, 늑대인간의 정체를 폭로할 방법을 연구했다는 사실도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어둠의 장막 저편으로 숨어들었을 뿐, 그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 p.100 2. 그러자 의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마취도 하지 않고 이를 뽑았는데도 아프다고 소리치기는커녕 이마를 찌푸리지도 않았다면, 그건..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국내도서 저자 : 정여울 출판 : 홍익출판사 2014.01.10 상세보기 1. 그 후로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떠나지 못하는 것은 일이나 돈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 바깥을 꿈꾸지 못하는 내 자신의 닫힌 마음 때문임을. 우리는 저마다 자기 삶에 대해 완벽한 주인이다. 그런데 그 주인이라는 자리가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내 삶'이라는 이름의 열쇠나 지갑을 누군가에게 맡겨두고 잠시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여행은 우리를 잠깐 그 피곤한 '삶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든다. 내 삶의 자발적인 이방인이 된다는 것. 그것이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은밀한 기쁨의 또 다른 시작일 것이다. - p.145 2. 폐허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라 모든 곳이 있었던 한때를 ..
쿨한 여자 국내도서 저자 : 최민석 출판 : 다산책방 2013.06.30 상세보기 1. 우리의 이별에는 뭔가 정확히 매듭짓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완전히 묶어버리거나 아예 풀어버리거나 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러지 못한 채 3년이 지났고, 그사이 나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그 감정의 실체를 서로 외로웠다고 표현하기로 했다. 언어란 이렇게 항상 카탈로그에 존재하는 옷과 같다. 실제로 입어보면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색상이 약간 다르거나 해서 온전한 내 것이 될 수 없다. ㅡp.6 2. 어쩌면 그때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은 그녀와의 재회가 아니라, 그래서 그녀와의 또 다시 펼쳐질 미래가 아니라, 그리움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그리움의 감정 자체를 불러일으켜 세워 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국내도서 저자 : 무라카미 하루키(Haruki Murakami) / 양억관역 출판 : 민음사 2013.07.01 상세보기 [출처]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작성자 pencilk 1. 사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연히 쓰쿠루는 몰랐다. 그리고 자신이 그때 생각하던 것을 쓰쿠루는 사라에게 말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바깥으로 드러낼 수 없는것이 있다. 돌아가는 전차 안에서 다자키 쓰쿠루의 머릿속에 있던 것은 그런 종류의 생각이었다. ㅡp.55 2. "잘 알겠지만, 나고야는 일본에서도 몇 안 되는 대도시이지만 동시에 좁은 곳이기도 해. 사람은 많고 산업은 융성하고 물자는 풍부하지만 선택지는 의외로 적..
'과거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 내 삶의 모습, 즉 성격, 말투, 행동거지, 흉터, 주름 하나하나가 모두 내가 살아온 과거 전체의 응축물이며 흔적이고, 나는 사실 굴러갈수록 점점 더 커져가는 눈덩이처럼 이 과거 전체를 등 뒤에 업고서 이 과거가 미는 힘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ㅡ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 (1896)
내 젊은 날의 숲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문학동네 2010.11.10 상세보기 1. -얘, 그 인간이 모범수가 되었대. 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아버지가 구속된 후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 인간, 또는 그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인간' 또는 '사람'이라는 익명성에는 어머니가 살아온 삶의 피로감이 쌓여 있었고, 익명성을 다시 구체적 대상으로 특정하는 '그'라는 말에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ㅡp.9 2. 눈 덮인 숲 속의 나무들은 눈과 숲의 익명성 속에서도 개별자로서 외롭거나 억눌려 보이지 않았다. 나무의 개별성과 숲의 익명성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이나 구획이 없었다. 나무는 숲속에 살고, 드문드문 서 있는 그 삶의 외양으로서 숲을 이루지만, 나무는 숲의 익명성에 파묻히지 않았다...
야간 비행/남방 우편기 국내도서 저자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Roger De Saint Exupery) / 허희정역 출판 :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09.30 상세보기 1. 파비앵은 그만 무기를 내려놓고 무겁고 욱신거리는 통증을 살피고 싶었다. 사람은 빈곤 속에서도 풍요로울 수 있으니까. 또한 여기서 소박한 사람으로 살면서 이제부터 변하지 않는 풍경을 창밖으로 바라보고도 싶었다. 이렇게 조그마한 마을이라도 그는 기꺼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란 일단 선택을 내린 후에는 자기 삶의 우연성에 만족하기 마련이고 그것을 사랑할 수도 있으니까. 그건 마치 사랑처럼 우리를 포위한다. ㅡp.9 2. 이제 그는 야경꾼처럼 밤의 한가운데에서 밤이 인간을 보여 준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