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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aily Life

무지개

pencilk 2006. 3. 29. 02:36

일요일에 토익 시험을 쳤다. 학교 중간고사도 아니고 무려 토익 시험을 벼락치기로 공부하고서 치러 가면서 그래도 이제 겨우 두번째 치는 거니까, 라는 자기 합리화를 했다. 일본 가기 직전에 처음 쳤던 토익 점수가 워낙에 별로였으니 그 때보다야 오르겠지, 라는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 마음 속 한구석의 작은 위안이었다.


시험 당일 아침까지도 문제집을 풀면 족족 틀려대서 절망적이었는데, 놀랍게도 시험 내내 '어라, 이거 해볼만 하잖아?' 싶었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는 잘 친 것 같다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렇게 상큼한 기분으로 참 좋아하는 그녀들을 만나러 안국동에 갔다. 고등학교 때부터 줄기차게 토익을 쳐와서 토익에 있어서만큼은 나보다 한참 선배인 긴이 이번 토익 되게 쉬웠다고 말했다. 뭐 솔직히 난이도가 매회 같을 리도 없고 쉬운 회에 쳐서 운좋게라도 높은 점수 한 번만 따놓으면 이력서 낼 때 써먹을 수 있는 게 토익이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솔직히 조금 좌절했다.ㅋㅋ 뭐 그래도 쉬웠다는데 쉬운 줄 몰랐던 것보단 낫다고 위안하기로 했다.



긴, 화주와 셋이 만나는 데 그 중 둘이 이제 강남에 산다. 그런데도 우린 그 먼 길을 꾸역꾸역 가서 안국동에서 만난다. 마침 약속이 있어서 안국동까지 차를 태워준 오빠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강남에서 만나지 않고.' 글쎄, 강남? 우린 강남 별로 안 좋아한다. 강남은 운치가 없잖아. 학교가 신촌이라서 신촌에서도 자주 놀긴 하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건 주로 종로, 인사동, 대학로, 한강, 홍대, 뭐 그런 데다. 아님 아예 서울을 뜨던가. 어디 갈까, 하면 술 마시러 가자 노래방 가자가 아니라 임진각이나 갈까? 그딴 소리나 한다. 학교 앞에 있는 신촌 기차역 앞에서 서성거리면서. 그러면서도 또 귀찮아서 못 갈 때가 더 많은 게 우리이기도 하다.


안국동에 있는 작은 까페에서 (역시 이번에도 화주가 좋다고 오라고 한) 지금 이대로는 안돼, 라는 주제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뭔가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 안 잡힌다. 그런데 우리 특징이, 뭐 잘났다고 일반 기업에 취직하기를 너무 싫어한다. 나름대로 뜻을 품고 기웃거려 본 곳이 일반 회사가 아닌 신문사, 잡지사, 방송사 뭐 그런 데들이었는데, 그 중의 잡지사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성화주가 딱 2달만에 잡지사 미래 없음의 결론에 이르렀다. 미래도 미래지만, 우리가 꿈꾸던 그런 곳이 아니란다. 일은 죽도록 하고 돈은 쥐꼬리만큼 주고, 무엇보다 고생하고도 보람이 없더란다. 절망이다. 신문사나 방송사는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다. 그나마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잡지사였는데, 그럼 이제 우리는 뭐해야 하나.


화제는 우리끼리 만들면서 즐거웠고 우리끼리 대만족했던 2003년 여름의 페이퍼진 듀에까지 이어진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우리가 만든 잡지 죽였지 않냐? 자아도취에 빠진다. 그리하여 다시 우리는 창업의 꿈을 꾼다. 그럼과 동시에 우리의 무능력함에 머리를 찧는다. 근데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어떻게 독창적이고 참신한 기획을 해서 니치 마켓을 파고들 것인가. 화주 말대로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 결코 잡히지 않는다. 이야기해대는 내내 화주가 핀 담배 연기가 부옇게 시야를 흐리다 서서히 사라져가듯 그렇게 우리들의 무수한 생각들도 뚜렷한 형체는 보이지 않고 허공을 헤매다가 다시 사라진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떠든다. 이번에도 결국 별다른 결론 없이 헤어졌지만, 다음에 만나면 우리는 또 창업 얘기를 하고 있을 거다. 따지고 보면 나와 긴, 화주, 이렇게 세 멤버가 모인 건 내가 일본 가기 전이었으니까 적어도 1년은 넘었을 거다. 1년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처럼 우리의 무능함을 통탄하고,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우리의 미래를 낙관하며 주제에 뭔가 저질러 보자고 모의한다.


긴이 먼저 가고 남은 화주와 종로에서 맛있는 오겹살(메뉴판엔 오겹살이라 적어놓고 모든 종업원들이 삼결살이라 불렀던 그 오겹살!)을 먹고서 터질 것 같은 배를 잡고 또 다시 맛있는 커피를 찾아 간 까페 LAVAZZA에서 화주가 롤러코스터 5집을 들어봤냐 했다. 그러고 보니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요즘 놀랍게도 동방신기 노래에 빠져 있었다.ㅋㅋ


우연찮게도 까페에서 롤러코스터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문득 한창 막연하게 휘청거리던 시기에 가슴에 꽂혔던 롤러코스터 노래의 가사들을 떠올렸다. 바로 저번 앨범 '무지개'의 가사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야. 달라질 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
이 가사를 말해주자 화주가 웃느라 넘어간다. 너무나 콕 찝어서 우리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웃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우리들 스스로가 굉장히 좋아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우리는 아마 다음에 만나도 또 같은 대화를 하고 있을 거다. 달라질 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 그래도 어쩌면, 언젠가는, 달라질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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