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리뷰] 서유미, 『쿨하게 한걸음』

쿨하게 한걸음 서유미 저 창비 | 2008년 03월

스물 일곱, 서른 셋 그녀에게 공감하다
| --- 정현경 (pencil@yes24.com)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에 대한 기사를 하나 먼저 읽었드랬다. 대학시절부터 신방과라는 전공 탓인지 매일 빼놓지 않고 읽었던 신문을 취직한 지 한달만에 끊고 이제는 거의 신문과 담 쌓고 살고 있지만, 그래도 꼭 챙겨보는 중앙일보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기사였다. 기사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설은, 제목과 달리 '쿨하지' 않다." 라고. 그래서 나는 『쿨하게 한 걸음』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 어떤 'so cooooool~'에 대한 기대를 깨끗이 접어 버리고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정도면, '쿨하게 행진', '쿨하게 전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쿨하게 한걸음' 정도로는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공 연수의 객관적인 상황만을 따져본다면, 대체 이 소설 어느 대목에서 '쿨함'을 찾을 수 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서른 셋의 나이에 심드렁하던, 하지만 조금만 참고 잘 버텼(?)다면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을 지도 몰랐을 연애를 끝내버렸고, 그렇다고 실연의 상처로 괴로워하지도 않았으며, 회사에서 구조조정 바람이 불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먼저 사표를 내버린다. 직업도, 남자친구도 없는 서른 셋의 여자 주인공이 선택하는 것은 바로 '공부'다. 그것도 심지어 행시도, 사시도, 임용고시나 언시도 아닌, 뚜렷한 목표 없는 공부다. 그저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는지 기억을 더듬어가며, 도서관에서 마음이 가는 분야의 책들을 열심히 섭렵하는 정도다.

나 역시 책을 읽기 전에 이 객관적 상황만을 보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 우울하군.' 그리고 책을 읽어가던 중반쯤에는 '『달콤한 나의 도시』의 현실 버전, 혹은 우울 버전' 정도의 느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덮은 지금은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물론 연수 주위의 인물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마치 내 주위의 일상을 끌어다 놓은 것 같다. 일 안하고 쉬는게 소원이라더니 정년 퇴직 후에 더 열심히 일자리를 찾는 아버지, 갱년기 때문에 우울해하고 '누구 자식은 어떻다더라'를 입에 달고 사시는 어머니, 회사를 때려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와 실컷 자유연애를 즐기다가 조건 맞는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 모두 지금 내 주위의 '아무개의 모습이네'하고 끼워맞출 수도 있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하지만 주인공 연수는?

어떻게 보면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연수, 그녀만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쿨하기는 커녕 구질구질해 보인다. 나의 서른셋이 저런 모습일까봐 걱정되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녀는 충분히 쿨해 보인다. 이놈의 회사 때려치네 마네 하면서 책상 두번째 서랍에 사표를 넣어두고도 뾰족한 대안 없이는 회사를 때려치지 못하는 것이, 이 남자가 정말 내 인생의 반려라는 확신이나 설레임 따위 없어도 이 나이에 어떻게 또 새로운 남자를 만나겠어, 혹은 내가 이만한 조건의 남자를 또 만날 수 있겠어, 하면서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기보다는 결혼하는 쪽으로 마음을 잡는 것이, 바로 진짜 현실 속의 서른셋 여자들 아닌가.

그러니까 이 책의 주인공 연수는, 그 모든 편한 길을 뿌리치고 쿨하게 한걸음을 내딛었다. 비록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전진이 아닌 후진으로 보일지라도, 남들 다 앞만을 향해 정신없이 걸어갈 때 쿨하게 한걸음 뒷걸음질 치는 것도 뭐 그리 나쁘지 않잖아? 이거야말로 진짜 쿨한 거 아닐까? 뭐 그런 생각.

물론 쿨하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 대단히 훌륭하다거나 나도 그러고 싶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냥, 이 시대의 우리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겠구나. 언젠가, 나도 이런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그래'라고 말해주는 든든한 친구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YES24 편집자 리뷰
원문 : http://www.yes24.com/24/goods/2851690?scode=032&OzSrank=1#contentsYes24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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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이별은 정말 처음이다. 사랑만 변하는 게 아니라 이별도 변하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이별하게 되면 그 이유와 변심의 주체와 상대의 처사에 대해 집요하게 생각했다. 복수를 다짐하기도 하고 추억에 잠겨 울기도 하고 끝난 사랑을 돌이키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다지 미련이 남지도 않았고 체념도 빨랐다. 상대에 대해서도 대충 담담했다. 다만 잘한 걸까, 하는 의심이 일었다. 철이 든 건지, 정직함을 잃어버린 건지, 씨니컬해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2.
갑자기 머릿속으로 스무살이 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땐 주변에 의미없는 친구들도 많았고 애인 될 가능성이 있는 남자들도 많았다. 물론 모든 감정은 극단적으로 부풀어 있었고 커피를 열 잔은 마신 것처럼 쓸데없이 들떠 있긴 했다. 선택해야 할 것은 너무 많았고 그것들이 나중에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만들 것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그에 비해 삼십 대는 뭐랄까. 별로 열고 싶지 않은 문이 저홀로 열린 느낌이다. 궁금한 것도 없고 할 수만 있다면 그 문을 도로 닫고 싶은 심정이다. 삶의 무게를 혼자 짊어져야 하고 시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이십대에는 더이상 자란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스스로 성숙하다고 느끼지만 삼십대에는 좀더 성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3.
부글거리던 연애만 국자로 걷어내도 인생은 참 단출해진다. 거품만 걷어냈을 뿐인데 내용물이 반 이상 사라져버린 냄비를 들여다보면 한심하고 처량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몇년 동안 내가 관계를 맺은 세상이라고는 직장과 K와 몇명의 친구들뿐이었다. 그런데 그 편협한 세계 중 하나가 예고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대신 채워넣을 것에 대해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공백은 예상보다 꽤 컸다. 나는 남아돌게 된 시간과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패닉상태에 빠질 지경이었다. 어쩌면 내가 모텔방에 두고 나온 것은 K가 아니라 안락함과 익숙함의 한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친밀하고 편안하고 닭살 돋는 감정으로 가득하던 세계. 하지만 언제까지나 사라진 세계의 기억에만 사로잡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4.
바뀐 것은 자리만이 아니었다. 사훈은 ‘복사할 때 이면지를 사용하자’가 되었고(이것은 언제나 회의의 중요한 안건이 되곤 했으며 그밖에도 휴지를 아껴 쓰자, 책상정리를 잘하자, 사원들끼리 친하게 지내지 말자,가 회의 안건으로 떠오르곤 했다) 올해의 표어는 회사에 청바지를 입고 오지 말자,다.
검은 청바지 때문에 부장에게 두 번이나 불려가 지적을 받았다. 한번만 더 불려가면 청바지 때문에 회사를 그만둬야 할 판이었다. 부장 정도의 직책을 가진 사람이 일개 사원의 옷차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습지만, 듣다보니 질책을 한답시고 골라쓴 단어가 더 가관이었다.
“청바지 입고 오지 마세요. 보기 안 좋습니다, 네? 일하는 데 지장이 많아요. 한번만 더 발각되면…… 아시겠죠?”
김이 전해준 부장의 멘트는 한동안 여직원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었다.
“파마하지 마세요. 보기 안 좋습니다.”
“다이어트하세요. 보기 안 좋습니다. 옷 입는 데 지장이 많아요. 계속 살찌면…… 아시겠죠?”
“알긴 뭘 알아. 한번만 더 발각되면 지가 어쩔 건데? 벗길 거야? 미니스커트 입고 와도 그런 소릴 나불거릴까? 일하는 데 지장이 많긴 뭐가 많아.”
“그러게 말이야. 뭘 입든지 무슨 상관이야. 지가 무슨 학생주임이야? 여기가 고등학교냐고.”
하지만 욕을 하고 나도 영 개운치가 않았다. 어쨌거나 이런 회사에 다니며 월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우리다. 누가 다녀달라고 비는 것도 아니다. 욕을 하다가 잠시 침묵이 찾아오면 체념의 한숨 같은 게 흘러나왔다.

5.
가끔은, 알콩달콩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유부녀들이 결혼하지 말걸,이라고 말할 때마다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다. 간사한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결혼생활과 일, 거기에 아이까지 모든 면에서 잘 해내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힘이 될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다른 사람들도 고민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 더 위로가 된다.

6.
이미 사십대에 가까워진 사람들은 스무살에 대해 말하듯 삼십대 초반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다가올 마흔살에 대한 중압감이 더 크다. 서른몇살은 그런대로 낭만도 있고 어떤 전환의 여지가 있지만 마흔살은 다르다는 것이다. 삼십대가 계란 한 판이라면 사십대는 계란찜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렇게 굳어진 채로, 더 이상 변형을 꿈꾸지 못하는 채로 그릇이 비워지기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다들 술잔을 비웠다. 계란찜이라…… 깨질까봐 전전긍긍하던 계란이 차례차례 깨지고 완전히 풀어지고 불 위에서 부글부글 끓어야만 계란찜이 되는 것이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퇴사기념 회식이 아니라 중년들의 신세한탄의 장 같았다. 마흔에 가까운 삼십대 후반들은 삼십대 초반인 나를 부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앉아 있다보니 이십대가 지나가서 기분이 이상하다고 말했다가는 몰매라도 맞을 것 같았다. 벌써부터 마흔살이 두려워졌다. 술집에서 나오는데 돌이킬 수 없는 길로 한발짝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7.
문제적 사회에서 살려다보니 다들 어딘가 좀 이상한 채로 살아간다. 때로는 그게 문제를 타개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거기 빠져서 열심히 허우적거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면 누군가에게 재빨리 바통 터치를 한다. 그리고 뒤에 모여서 수군거린다. 걔 요즘 이상하지 않니? 신경 좀 써야겠더라. 그게 복귀한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8.
대학때는 동남과 전혀 친하지 않았다. 그냥 같은 과 동기니까 마주치면 인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맘에 맞는 사람을 골라 친구가 되기보다 자주 만나는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나와 맞는 면을 찾게 되는 것 같다.
한 반에 쉰명, 한 학년에 몇백명씩 있던 학생때와는 정말 다르다. 그때는 마치 옥석을 가리듯 나와 뭔가가 통하는 친구를 찾았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다른 친구로 금세 바꿨다. 후보는 얼마든지 있었다. 학년이 올라가 반이 바뀌면 대부분 붙어다니는 친구가 달라졌다. 사람이 없어서 친구가 없는 게 아니다.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친구와 함께 다니면 불편하고 힘들었다. 차라리 혼자인 게 편했다.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과라고 중고등학교에서처럼 하루종일 붙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같은 과 동기, 선후배부터 동아리까지 널린 게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이 많을 때는 언제나 조바심이 생기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친구는 언제든 만들 수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확실히 사람의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을 먼저 봤다.
나이가 조금 드니까 내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너무 기대가 많았고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사람들을 그냥 지나쳐오고 지나쳐가게 한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조금 알게 되니까 이제는 만날 기회가 별로 없다. 원래 기회라는 게 정신을 차리고 나면 잘 오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