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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윤대녕의 '눈의 여행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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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윤대녕의 '눈의 여행자'

pencilk 2003. 12. 1. 22:26

어느 날 저녁 사막에 내리는 눈을 목격했을 때의 기분은 어떨까. 눈에 대한 단상은 백색의 이미지에서부터 차갑고 시린 이미지, 그리고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다는 것까지 다양하다. 윤대녕이 눈을 소재로 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8년 전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우연찮게 목격한 눈 내리는 풍경에서 비롯되었다.
모래와 눈이 가진 이질적인 두 이미지 사이로 들려오는 미지의 외침이 그를 이끌었다. 하지만 밤낮으로 눈이 퍼붓는 일본의 동북부 지역에서 눈은 신비로운 존재가 아닌 하나의 일상이다. 일상을 눈과 함께 살아가는 일본의 니가타에서 그가 풀어놓는 '눈의 여행'은 어떤 모습일까.


눈의 여행을 떠나다

<눈의 여행자>는 계약된 소설을 1년째 쓰지 못해 고민하던 소설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설쓰기에 대한 소설, 메타 형식이다. 글쓰기가 잘 되지 않아 고민하던 윤대녕 자신의 모습을 담기도 한 이 소설가는 어느 날 일본으로부터 자신의 독자라는 재일동포 여성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녀는 언젠가 그가 눈에 관한 작품을 써보고 싶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그라면 눈 속에 버려진 아이를 찾을 수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일본으로 '눈의 여행'을 올 것을 권유한다. 수수께끼와 같은 편지를 받은 소설가는 에이전트의 반강요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어떤 끌림에 의해 '눈을 좇아'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에 도착한 소설가는 여인이 보내온 어린이용 숫자놀이 책 속에 적힌 보름간의 행적을 좇아 니가타, 다자와코, 아키타 등을 여행한다. 소설 <설국>의 배경이었던 니가타 에서부터 시작된 소설가의 여행은 말 그대로 '눈과의 동행길'이다. 눈으로 뒤덮힌 설원은 적막에 휩싸여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세상이다. 눈은 너무도 천천히 내려서 무게가 느껴지지도,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과연 '눈의 여행'답게 눈에 대한 묘사도 탁월하다. 눈을 바라보면서 소설가는 시간의 절대성을,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나라는 존재도 이 무량히 퍼붓는 눈송이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몰라도 다 함께 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함께 쌓여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더불어 내가 한 송이 눈이 되어 떠돌 때 가슴에 품고 있는 상처나 고통도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 윤대녕 <눈의 여행자> 본문 중에서 -


역진행, 눈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소설가는 숫자놀이 책 속 메모에 적힌 대로 그녀가 갔던 곳에 가고, 그녀가 먹었던 음식을 먹고, 그녀가 했던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결국 찾지 못했다는 그 아기를 찾으려고 한다. 허리까지 차오른 눈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자신을 덮쳐옴과 동시에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는 기묘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눈밭을 헤매며 찾은 것은 4년 전에 헤어진 자식이다. 그를 일본으로 떠나오게 한 마음 속 깊은 곳의 어떤 끌림 역시 외사촌 누나와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아들 '수' 때문이었다. 숫자놀이 책의 메모 역시 일찍 잃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던 한 여인의 것이었다.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그녀는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녀의 남편은 소설가가 '눈의 여행'의 이야기를 글로 써준다면 아이와 함께 눈 속으로 사라져버린 아내가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편지의 비밀이 밝혀지고 여행이 끝날 무렵 소설가는 4년 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의 아들 '수'를 만난다.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자신을 '눈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한다. 일본에서의 여행이 니가타에서 다자와코, 아키타 등을 거쳐 다시 니가타로 돌아온 것처럼, 그는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삶에 있어서의 '역진행'을 온몸으로 느낀다. 역진행은 퍼즐을 풀다 보면 늘 되풀이되는 현상이듯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게, 아이를 영원히 잃을 뻔했던 여인도, 그리고 소설가 자신도 결국은 아이를 다시 되찾고자 한다.


눈의 여행에서 돌아온 후

<눈의 여행자>는 윤대녕의 다른 글들처럼 영원회귀사상과 낭만적 허무주의가 드러나는 소설이다. 소설의 내용은 자칫 신파조로 흐를 수 있을 만큼 안타까운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지만 윤대녕은 의도적으로 심각해지지 않기 위해 다소 덤덤한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잠깐 내렸다가 녹는 눈처럼 우리의 인생도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고 말하는 듯 하다. 눈의 이미지를 통해 잃어버린 아이를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의 슬픔과 애잔함을 감각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하지만 이런 환상적 요소는 언제나 그의 글에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아왔던 요소다. 1년째 계약된 소설을 마치지 못한 작가에게 에이전트에서 비용까지 대주며 일본에 가라고 하는 설정이나, 다짜고짜 여인의 기록을 그대로 따라 하는 설정 등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글에 몰입하기 힘들게 한다. 곳곳에 여행 안내서처럼 이야기가 진행되는 부분도 필요 이상으로 길다.

윤대녕식 낭만주의에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책은 어쩌면 조금은 불편한 여행이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12월, 눈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와 설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고 싶다면 이 책과 함께 눈의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웹진 듀 2003년 12월호 기사
http://ewhad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