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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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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폴리, 소렌토 그리고 카프리
나는 호텔 카프리에서 방을 잡았다.
"이름 한번 잘 지었군요. 이름 생각해 내는 데 시간 좀 걸렸겠는데요?"
매니저에게 이렇게 물었지만 그는 유럽 호텔 지배인이 미국 관광객과 벌레들에게만 보이는 경멸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16. 밀라노와 코모
로카르노는 이상한 곳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도모도솔라로 가는 2시 기차표를 샀다. 이 지명은 서른일곱 가지 방법으로 발음할 수 있었는데, 나는 매표소 직원에게 그 서른일곱 가지 발음을 모두 시도해야 했다. 그는 미국인이 발음하기 힘든 인근 지명이 뭔지 도통 상상할 수도 없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잔뜩 찌푸리더니 내가 마침내 비슷하게 발음를 했을 때에야 "아, 도모도솔라!"하고 외쳤다. 그가 서른여덟 번째 방법으로 발음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역시나 친절하게도 철로 보수 공사 때무넹 첫 구간 10km는 일단 버스로 운행한다는 말을 전하는 걸 잊었다.
승강장에서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열차는 오지 않았고, 기다리는 사람도 나뿐이라는 게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도모도솔라로 가는 기차는 하루에 두어 대밖에 없었다. 적어도 한두 명은 승객이 더 있어야 했다. 결국 짐꾼에게 물었더니 그는 기차역 포터들 특유의 '나가 뒈지든지 말든지' 하는 대단히 친절한 태도로 아무 데나 가리키면서 버스를 타야 한다고 말했고, 어디서 버스를 타야 하느냐고 내가 다그쳐 묻자 손동으로 아까 그쪽이 아닌 다른 쪽을 또 모호하게 가리켰다. 밖으로 나가자 도모도솔라행 버스가 막 출발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버스 앞 유리창에 붙어 200m 남짓 뛰어가면서 버스 좀 세워달라고 운전사를 설득할 수 있었다. 나는 그곳을 너무나 떠나고 싶었다.
19. 오스트리아
나는 가까운 과자점에 가서 커피와 엄청난 칼로리의 설탕 덩어리 케이크를 들면서 비엔나를 어떻게 공략할까 구상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비엔나 옵저버 가이드』라는 여행 책자에는 이런 조언이 나와 있었다.
"비엔나에서는 박물관을 한 번에 하나씩 공략하는 게 최선이다."
고맙기도 해라! 지난 몇 년 동안 늘 박물관을 한 번에 둘씩 보러 갔는데, 왜 계속 기분이 나쁜지는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건물 바깥에는 엽서 판매대가 있었다. 루벤스와 뒤러 같은 화가가 그린 '알베르티나 컬렉션'의 그림들을 담은 엽서가 많았는데 다 처음 보는 그림들이었다. 판매대를 운영하는 여주인이 영어를 못했다. 내가 뒤러의 그림이 담긴 엽서 하나를 집어 들고 원화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여주인은 "이거 엽서인가요, 아니면 먹는 건가요?" 라고 묻기라도 한 듯이 비엔나 사람 특유의 짜증 섞인 말투로 "야, 야, 다스 이스트 엠 포스트카드(Ja, ja, das ist em post-card)"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내가 뭘 물어보는 건지 파악하려고 시도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이 엽서 아줌마를 그 자리에서 때려눕히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22. 이스탄불
그러나 시작은 좋지 않았다. 나는 소피아 쉐라톤 호텔에서 내부 예약 시스템을 통해 이스탄불에서도 쉐라톤에 방을 예약했는데, 호텔이 알고 보니 골든 홀과 구시가지에서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방은 깨끗하고 나름대로 고급스러웠지만 텔레비전은 고장 났고, 욕실에 세수하러 갔을 때에는 배관이 심하게 떨면서 전쟁 영화에서처럼 탕탕 소리가 나더니 쿨렁대는 소리가 몇 번 난 당므에는 진득한 갈색 국물이 수도꼭지에서 계속 쏟아져 나왔다. 한 10분 동안 수도꼭지를 틀어놨지만 갈색 물은 그치지도, 색깔이 엷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이런 방에 하룻밤에 150달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흐르는 물을 보면서 변기에 앉아 여행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 생각했다.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이 아닌가.
+
그 동안 사놓고도 읽지 않고 쌓아두었던 책들, 그리고 끝까지 읽지 못하고 도중에 읽다 만 수많은 책들을 좀 정리해보려고 한다. 어제 연차를 쓰고도 바닥으로 자꾸만 가라앉는 컨디션을 먼저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 전시회를 보러 가거나 하는 등의 생산적인 일은 거의 하지 못하고 방 안에 누워만 있었다. 그러다 오후에서야 정신 좀 차리고 집 앞 카페에 나가 커피 마시며 김연수 책을 좀 읽었는데, 좋기도 하고 조금 버겁기도 하고.
벌써 4월. 슬슬 장소만이라도 휴가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은데 아직 아무것도 정한 건 없다. 그러다 문득 한꺼번에 우르르 사놓은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시리즈가 생각났다. 발칙한 유럽산책, 영국산책, 미국 횡단기, 미국학으로까지 이어지는 4권의 책을 모두 사놓았지만, 정작 내가 읽은 건 유럽산책뿐.
끝까지 다 읽었는지, 읽다가 말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책을 펴보니, 역시나 여기저기 내가 좋다고 생각한 부분들에 책 귀퉁이가 접혀 있다. 그 부분들만 다시 읽는데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여행지에 대한 찬양 일색이거나 그 여행에서 무언가 대단한 깨달음을 도출해내려 애쓰는 지루한 패턴의 여행기들 사이에서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가 특별한 것은 바로 저런 부분들 때문일 거다.
지금 읽고 있는 김연수 책을 다 읽고 나면 『발칙한 영국산책』을 읽어야겠다. 읽고 나면 영국이 너무 가고 싶어 여름 휴가를 영국으로 떠날 계획을 세울지도 모르겠다. 현실적으로는, 힘든 상태긴 하다. 일단 올해도 인센티브를 받을 확률이 매우 낮고, 작년 파리의 여파로 웬만하면 마일리지로 갈 수 있는 일본이나 홍콩 정도로 다녀오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거다. 뭐 어찌됐든, 갈 수 없다면 책으로나마 대신하면 되니까. 오랜만에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를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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