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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토스카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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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은 중독성이 있다. 비록 즐거움과 행복으로만 가득차지 않았다 하더라도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 비 오는 골목을 혼자 걸었던 외로움도, 길을 헤매며 안절부절 못했던 당혹함도, 긴 여정 사이에 생겼던 어느 날의 무기력함도, 낯선 곳에서의 팽팽한 긴장과 신체적 고통마저도 일단 기억 상자 속으로 들어가면 가슴 아린 추억이 된다. 가는 빗줄기가 내리던 안개 낀 산속 마을의 쓸쓸함은 그리움이 되었고 석양 무렵의 광장 한편에 앉아 혼자 와인을 마시던 기억은 이제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또 떠난다. 여행은, 어쩌면 결심하는 순간부터는, 아주 쉽게 풀릴지 모른다. 여행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마음먹는 일이 가장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설렘과 호기심의 힘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지 않던가. 그 마력은 너무나 강렬해 이미 치러진 그 전 여행의 아픈 기억조차 핑크빛 담요로 다 감싸고 만다.
2.
굵어진 빗줄기 사이로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시 언덕까지 올라간 나는 두오모 뒤쪽 둥그런 공원을 걸었다. 개를 끌고 나온 한 남자가 셔츠 바람으로 뛰고 있다. 관광객 몇 사람이 비를 피해 두오모 안으로 급히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싫지만은 않다. 이 시간도 괜찮다. 혼자 여행을 시작하면서 매 시간 이런 생각을 해온 것 같다. 나는 지금 외로운지 아닌지. 견딜 만한지 아닌지. 매번 마음 상태를 스스로 점검해 온 것이다. 스스로 올가미를 만들었다. 외로움은 그 한계도 색깔도 성격도 정확하지 않은데,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할 감성의 순리를 이렇게 저렇게 꿰어 맞추려 했다. 그래, 나는 지금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이 눈물 나도록 가슴 아픈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애타게 그리운 것이 아니라면, 그저 담아야 할 빈 그릇이 커져 몸속에서 무언가를 더 채우려고 안달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더 깊어지고 절실해지는 거라면, 아, 괜찮은 외로움 아닌가.
3.
여행의 중반, 행복과 불행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들이닥치고, 사랑할 사람도 미워할 사람도 없는 혼자이 시간은 '나'라는 대상을 놓고 애증의 줄다리기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 위에서 만큼은, 여전히 설렌다. 해가 들어갔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가는 빗줄기가 창문 위로 떨어진다. 쓸슬해진다. 쓸쓸함도 행복이다. 이 두 개의 감성은 서로 밀쳐내는 것이 아니다. 쓸쓸함의 상처를 안아주는 행복은 더 깊고 더 오래 간다. 나는 지금, '회환'이라는 감정과 마주쳤다.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 내가 떠난 사람들, 나를 떠난 사람들, 가슴이 아리도록 아팠던 시간들과 가슴이 벅차도록 즐거웠던 시간들. 아, 왜 좀 더 잘 하지 못했을까. 왜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그 시간이 그토록 소중하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이렇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기 위해 떠나온 것일까. 후회, 미련, 아쉬움 같은 감정은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옛날 사진 앨범도 들척거리지 않았던 나는 구름 낀 토스카나 언덕길에서 과거의 보따리를 풀고 있다. 형형색색으로 가득 찬 보따리의 내용물은 희로애락을 다 담았다. 나는 웃었다 울었다, 얼굴을 찡그렸다 코를 크게 풀었다 하며 서서히 과거 여행에 빠져들었다. 그 속으로 주저 없이 들어가 망므껏 휘젓고 나니 다른 세상이 보인다.
4.
우리는 본연의 임무를 잊고 이 축축한 오후의 끝에서 편하게 사는 얘기를 했다. 인생의 양면성, 행복과 그렇지 않은 것(불행이라 표현하고 싶지 않다), 기쁜 일과 그저 그런 일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들. 점심을 먹고 크리스탸나와 헤어져 피렌체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까지 리나와 나는 이야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리나는 마치 20년 지기처럼 덕덤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야 되나 봐요.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기대도 안 했는데… 오늘을 잊지 못할 거예요. 자유롭게 돌아다녀요. 가고 싶은 데 가고, 쓰고 싶은 글도 쓰고."
그녀보다 조금 일찍 이 과정을 지나온 나는 호텔 앞에서 헤어지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꿈꾸는 거 멈추지 마세요. 지금은 지쳐 있다 해도. 살바토레가 그랬던 것처럼…."
5.
"토스카나 여행… 힘들었지만 좋으셨죠? 뭐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어떤 말이 지금 내 심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잠깐 뜸을 들이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상미가 웃는다. 이미 7년째 토스카나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그녀가 아닌가.
"지금 살고 있는 그대로 살아도 되겠구나, 조금 느리게 가도 되겠구나, 하는 거. 토스카나가 나를 안심시켜주네요."
"알아요, 어떤 건지."
나는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피렌체 공항은 여전히 한적하다. 양 어깨에 짐을 둘러메고 출발 게이트를 통과할 때까지도 상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녀도 나도 분명 느끼고 있을 것이다. 천천히 살아가는 딱 그만큼 아름다운 세상 구경을 더 할 수 있다는 것을. 행복은 손에 잡히지 않는, 그래서 영원히 '추구'만 하다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금이라도 이것이 행복이다, 라고 고개를 낮추면 한없이 높고 눈부신 그 세상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토스카나에서 받은 인생 수업. 나의 고향집으로 가져갈 가장 값비싼 기념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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