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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풍경과 상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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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내 초로初老의 가을에, 상처라는 말은 남세스럽다. 그것을 모르지 않거니와, 내 영세한 필경筆耕은 그 남세스러움을 무릅쓰고 있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 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언어는 마치 쑥과 마늘의 동굴 속에 들어앉은 짐승의 울음처럼 아득히 우원迂遠하여 세계의 계면界面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이 세계가 그 우원한 언어의 외곽 너머로 펼쳐져 있는 모습이 내 생애의 불우不遇의 풍경이다.
나는 모든 일출과 모든 일몰 앞에서 외로웠고, 뼈마디가 쑤셨다. 나는 시간 속에 내 자신의 존재를 비벼서 확인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몽롱한 언어들이 세계를 끌어들여 내 속으로 밀어넣어주기를 바랐다. 말들은 좀체로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에 묶어내는 몇 줄의 영세한 문장들은 말을 듣지 않는 말들의 투정의 기록이다. 아마도 나는 풍경과 상처 사이에서 언어의 징검다리를 놓으려는 미망迷妄을 벗어던져야 할 터이다. 그리고 그 미망 속에서 나는 한 줄 한 줄의 문장을 쓸 터이다.
벗들아, 나는 여전히 삼인칭을 주어로 삼는 문장을 만들 수가 없다. 나는 세계의 풍경을 상처로부터 격절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삼인칭의 산맥 속으로, 객관화된 세계 속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일인칭의 가장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아마도 오래오래 그러하리라.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 _ 전군가도 /사이판
꽃잎들은 속수무책으로 떨어져내렸다. 그것들의 삶은 시간에 의하여 구획되지 않았다. 그것들의 시간 속에서는 태어남과 절정과 죽음과 죽어서 떨어져내리는 시간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태어나자 마자 절정을 이루고, 절정에서 죽고, 절정에서 떨어져내리는 것이어서 그것들의 시간은 삶이나 혹은 죽음 또는 추락 따위의 진부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절대의 시간이었다. 꽃잎 쏟아져내리는 벚나무 아래서 문명사는 엄숙할 리 없었다. 문명사는 개똥이었으며, 한바탕의 지루하고 시시껍적한 농담이었으며, 하찮은 실수였다. 잘못 쓰여진 연필 글자 한 자를 지우개로 뭉개듯, 저 지루한 농담의 기록 전체를 한 번에, 힘 안 들이고 쓱 지워버리고 싶은 내 갈급한 욕망을, 천지간에 멸렬하는 꽃잎들이 대신 이행해주고 있었다. 흩어져 멸렬하는 꽃잎과 더불어 문명이 농담처럼 지워버린 새 황무지 위에 관능은 불멸의 추억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육신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으며 여자에 대한 그리움도 아니었으나, 그 그리움의 대상이 인간의 여자였다 하더라도 무방했으며, 들개나 염소의 암컷이라 해도 역시 무방했다. 무방하였다. 그것은 말하자면 종種과 속屬으로 구획되기 이전의 만유萬有의 '♀'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며, 내가 그 그리움을 감당해내기 위해서라면 굳이 인간의 '♂'이 아니라도 또 한번 무방하였다.
사랑을 이룬다는 저 속된 말에 의지해서 인간이 회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명을 통해서 세계와의 합일, 삶에 대한 직접성, 시간과 더불어 짜여지면서 흐르기에 도달하려는 꿈은 문명을 제거함으로써 거기에 가려는 꿈과 나란하다. 그리고 사랑 또는 여자, 여자가 아니라면 그저 '너'에 대한 내 사유의 전체도 이 틀로부터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저 나란함이야말로 내 삶 속의 말하여지지 않는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은 아마도 당신들의 비극과 동질의 것이되, 서로 소통되지는 않는 비극이리라.
겸재謙齋의 빛 _ 울진 월송정・망양정
일몰日沒의 빛은 바다에 닿아 죽는다. 바다를 가득 채우는 빛의 죽음은 가볍다. 빛들은 죽어서, 부재不在로부터 부재로 건너가는데, 그 건너가는 여정 속에서만 빛들의 삶은 빛난다. 그러나 그것들의 소멸을 죽음이라고 말헤서는 안 되리라. 빛들은 피와 살의 자식이 아닌 때문이다. 일몰의 동해에서 수면에 깔린 빛들은 소멸해가는 시간의 가루들이다. 저무는 해가 태백산맥의 사나운 등성이에 걸리면 산맥 위 하늘로 퍼지는 빛들은 수평선 너머로 몰려나가고, 빛들은 거기서부터 수면에 깔리면서 연안으로 퍼진다.
서해의 일몰은 내려앉는 해를 빛의 중심부로 끌어안고 침몰하는 것이어서 해가 원양에서 연안에 이르면 수면의 모든 빛들을 거두어가는데, 일몰의 동해에서 빛들은 산맥 너머로 빠지는 해의 고삐에서 풀려나 아비 없고 호적 없는 부랑의 무리로 떠돈다. 빛들은 인간의 언어가 개념화하는 그 어떤 색깔도 아니다. 빛들은 개념으로부터 멀리 비켜서서 흔들린다. 빛의 가루들은 빛의 원형으로부터 바래어져 있다. 산맥을 넘어가는 시간의 바람에 그 빛들은 불려가는데, 빛들의 표정은 바람에 쏠리워 지쳐 있다. 빛이 세계의 계면에 부딪쳐 색色을 이루되, 색은 빛에 실리지 않는다. 세계의 계면에 숨은 색들은 빛에 닿아 색으로 살아나지만 저물어가는 빛들이 아주 떠나버린 후에도 색들은 죽지 않는다. 빛들의 대화퇴 너머 원양으로 물러나갈 때 세계의 거죽에서 부랑하던 색들은 계면의 깊은 안쪽으로 내려앉는다. 빛과 색은 서로의 현존은 확인하지만 그것들은 마침내 섞이지 않는다.
낙원의 치욕 _ 보길도/소쇄원
소쇄원에서는 어떠한 관측소도 풍경 전체를 일방적인 사정거리 안에 두지 않는다. 소쇄원의 어느 구석을 어슬렁거려보아도, 인간의 움직임에 따라 새로운 관측소가 형성되고, 좀 전의 관측소는 스스로 소멸하여 풍경 속으로 편입된다. 풍경은 흘러가면서, 새롭게 바뀌고, 풍경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사물로서의 완강함을 버리고 존재의 껍질로부터 풀려난다.
낙원은 자유의 패러디이다. 헐거운 양식, 감추어진 양식은 낙원이 패러디라는 운명 자체를 감추려 한다. 감추어지는 운명이란 없다.
가을의 빛 _ 섬진강/구례, 하동
그 물 위에는 거꾸로 선 산속의 나무 한 그루까지도 비친다. 물은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물은 그 위에 싣고 있던 산 그림자를 잇닿는 물에게 넘겨주는데, 그 흘러감과 잇닿음에는 구획과 간격이 없는 것이어서, 흐르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 위에 비치는 산 그림자는 흘러서 사라지지 않는다. 가을의 빛은 익어가는 것들의 이름과 죽음의 색깔들을 사정없이 폭로하지만 빛 자체의 몸은 보이지 않는다. 익어가는 것들의 색깔은 붉거나 누렇거나 검다.
그 색깔들은 봄날의 비릿한 신생의 색깔이나 자지러지는 발랄함의 색깔도 아니고, 지나간 여름날의 그 강성한 색깔도 아니다. 익어가는 것들의 색깔은 그 완숙의 절정 밑에 조락의 쓸쓸함과 죽음을 수락하는 처연함의 색깔이 깔려 있다. 이룸과 죽음 사이의 구획을 허물고 삼투시켜, 그것들이 합쳐져서 드러나는 삶의 내용을 하나의 색깔이라는 구체적 현존 속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아직 살아서 보는 인간의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펼쳐놓는 가을빛의 저 말하여지지 않는 신비를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월자의 한 성정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터이다.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그 가을산의 한 계곡에서 나는 개울물을 투과해서 바닥으로 내려온 빛이 개울 바닥의 돌멩이들을 간지럼 태우는 장난질을 보았다.
저 일몰 _ 서해/대부도
일몰의 서해에서 소멸하는 것들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하늘과 바다와 개펄에 가득 찬 빛의 미립자들은 제가끔 하나의 단독자로서 반짝이고 스러지지만, 그것들은 그 소멸의 순간순간마다 다른 단독자들과의 경계를 허물어,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빛의 생성을 이루면서 큰 어둠을 향하여 함몰되어간다. 떼지어 소멸하는 빛의 미립자들은 시공 속에 아무런 근거도 거점도 없이 생멸했고, 다만 앞선 것들의 소멸 위에서만 생성되었고, 앞선 것들의 생성 위에서 소멸되었으며, 생성과 소멸의 종합으로서 함몰하였다.
저들의 생멸은 가볍고 유순하다. 저무는 빛의 미립자들은 그 소멸의 한복판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빛의 알멩이 속으로 사라진다. 생멸을 거듭하되, 생멸로 더불어 아늑한 빛의 알멩이들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은 시간의 끈을 따라서 수평선 너머로 몰려가는데, 인간인 나는 그리고 역시 당신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빛의 알멩이에 철없이 매달리기 십상이어서, 저 신생하는 빛의 새로움 속으로 사라진 앞선 시간의 빛들과 그 뒷소식을 결국은 챙기지 못한다. 당신과 내가 매달려 있던 저 새로움의 빛들은, 생성되는 순간에, 경험되지 않은 또 다른 생성을 위하여 제 실존의 자리를 내주고 소멸되는 것이어서, 일몰의 서해에서 당신과 나는 우리들이 지상에 건설한 사랑과 노동과 책과 밥과 술과 벗과 적과 꿈꾸기와 꿈 깨기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아무것도 허용받지 못하고, 아무 존재에게도 건너갈 수 없으며, 아무것도 쥘 수 없고, 아무런 개념에도 기댈 수 없으리라는 것을 힘들이지 않고 숨결처럼 자연스럽게, 그러나 확실히 알게 된다.
억새 우거진 보살의 나라 _ 운주사
초겨울의 억새는 그 운명의 빛깔과 냄새만으로 땅 위의 구름처럼 들판에 피어난다. 억새의 삶은 풍화되어야 할 존재의 무게를 극소화시키는 픽팍한 삶이다. 가벼움을 완성하고, 가벼움 속에서 풍화되어 죽어야 하는 운명의 내면은 가볍지 않다. 그것들은 하필이면 묵어버린 논이나 밭의 가장자리, 경작할 수 없는 야산의 비탈처럼 버려진 자리만을 골라서 서식한다. 가을이 깊어지고, 습기가 빠져가는 땅이 메말라지면 그 척박한 자리에서 그것들의 삶은 한 해의 마지막 햇볕 아래서 바래어진다. 바래어지는 삶의 고통을 이끌고, 그것들은 가벼움을 완성해낸다. 그것들의 목숨 안에서는 무게의 총화는 가벼움이고, 습기의 총화는 메마름이다. 초겨울의 마른 들에서 그것들은 헛것의 투명함과 헛것의 가벼움으로 바람에 흔들린다. 그것들은 빛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람이 부는 쪽으로, 숙일 수 있는 머리를 끝까지 숙이지만 그것들의 뿌리는 바람에 불려가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람에 시달리면서, 바래고 사위면서, 그 시달림 속으로 풍화되면서, 생사의 먼지로 퍼지고 번진다. 그것들은 애초에 바람이었던 것처럼 바람의 숨결과 포개진다. 11월의 엷은 잔광 속에서 그것들은 잔부스럼 같은 꽃을 피운다. 억새의 꽃은 흩어져 멸렬하기 위하여 피어나는 꽃이다. 그 꽃들은 죽을 때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바람 속으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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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김훈은 풍경과 상처, 그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영세한 문장을 끼적일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말하고, 말하려 하고, 또한 말하여지지 않음에 무참해한다. 하지만 알까. 누군가는 김훈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제 문장의 무력함을 느끼고, 또한 스스로 무참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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