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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Love, Love, Love 본문

THINKING/콘선틔ㅣ공연

연극 Love, Love, Love

pencilk 2013. 4. 17. 06:05


드디어 봤다. Love, Love, Love. (주의, 스포 난무 예정)


이선균과 전혜진 부부가 출연한다는 점과 제목마저 무려 Love라는 단어가 3번이나 들어가다 보니 당연히 사랑 얘기일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게 아니라는 후기 정도만 읽고서 보러 갔다. 가기 전부터 내가 이선균 1열에서 본다고 좋아하니 다들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걸"이라고 했는데, 긴가민가 하며 공연을 보고 나니 그게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았다. 이선균의 연기가 별로였다거나 실물이 실망스럽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고, 다만 전혜진이 너무 멋있었을 뿐이다... 마지막에 내 바로 앞에서 인사하는데 (그 배우들이 허리 약간 숙이고 두 팔 앞으로 내밀어서 앞에 앉은 관객들한테 눈 맞추며 박수치는 거) 전혜진과 눈이 마주친ㅡ혹은 마주쳤다고 착각한ㅡ 순간, 엄마 여자한테 이렇게 설레본 것도 또 처음이예요. ㅋㅋㅋ 그만큼 그녀는 멋있었다.


전혜진 얘기를 좀 더 하자면. 하얀거탑 때 이선균에 풍덩 빠져서 그가 나온 작품은 단막극부터 시작해 뮤지컬 출연 영상까지 죄다 찾아봤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히 그의 인터뷰 기사나 그가 출연한 토크쇼 같은 걸 보게 되고 그의 오랜 연인인 전혜진의 존재도 알게 됐다. 당시 이선균 갤에서 둘이 데이트하는 걸 봤다는 후기도 읽었다. (이런 걸 기억하는 이유는 그 후기에서 이선균보다는 전혜진이 너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서. 두 사람이 밥을 먹고 있는데 하얀거탑이 끝난 직후라 이선균에게 사인 요청하는 팬들이 꽤 있었고 그 와중에 후기를 남긴 이선균의 팬은 전혜진에게도 사인 요청을 했는데, 그때 그녀의 대응이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인지도, 인기 뭐 그딴 거엔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카리스마 작렬의 태도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게 결코 싸가지 없다거나 그런 느낌이 아니라 굉장히 쿨하고 당당해서, 뭔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달라서 놀랐던 것 같다. 연극과 뮤지컬에서 연기해오던 무명의 배우 커플 중 한 사람만 대중적으로 빵 떴는데, 뜬 사람보다 뜨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당당하고 카리스마 있어서 좀 놀랐달까. 아무튼 그런 후기였다.) 각설하고.


Love, Love, Love는 제목과 달리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1960년대에 청년기를 거친 유럽의 베이비붐 세대와 그 다음 세대 간의 갈등, 혹은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선균과 전혜진이 연기하는 케네스와 산드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풍요로운 경제 속에서 안락한 삶을 누린, 이른바 축복받은 세대다. 청바지, 미니스커트, 마약, 비틀즈에 열광하고 성해방과 페미니즘을 외치여 기성세대에 대항하던 그들도 이제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산드라가 말하듯 그들은 젊은 시절, 아니 평생을 '내가 진짜 원하는 것'만을 좇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직장을 가지고 좋은 집, 아름다운 자녀들을 두고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순간, 자식들 걱정따위 하지도 않고 '우리가 바라던 삶은 이게 아니었어. 지금 우린 행복하지 않아'라며 쉽게 이혼해버린다. 정년 퇴직 후에도 그들은 높은 연금으로 풍족하게 살아가고, 그런 그들의 풍족한 삶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며 남은 여생을 즐긴다. 


이러한 부모를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케네스와 산드라의 딸 로지가 자신의 불행을 부모 탓으로 돌리며 화를 낼 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할 수밖에 없는 건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배경으로 쓰여진 작품이 아닌데도 놀랍도록 우리들의 상황과 일치한다. (작가가 1980년생이라는데, 그 나이에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그 나이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쓸 수 있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로지가 39살이 되도록 열심히 바이올린 연주를 해왔지만 돈은 모이지 않고 여전히 집도 없고, 일하느라 결혼도 못 했을 뿐더러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는 어린 여자애랑 바람 나서 결국 헤어지고 만 자신의 상황에 대해 울분을 터뜨릴 때, 이 모든 게 엄마 아빠 때문이니 집을 사달라고 소리 지를 때, 그녀의 주장이 억지스럽다고 느끼면서도 그걸 단순히 억지라고만 말할 수 없는 건, 우리 모두 뼈아프게 그녀에게 공감하기 때문일 거다. 그녀는 말한다. 엄마 아빠는 편하게 사다리 타고 올라가놓고 그 사다리를 부셔버렸다고, 그래서 우리 세대는 너무 가난하고 고달프다고. 마흔이 다 되도록 정말 열심히 일해왔지만 그녀에게는 집도 남편도 자식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는 삼십 대에 이미 좋은 집과 차가 있었고 풍족하게 자녀들을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기억한다. 엄마 아빠는 내 나이 때 다 갖고 있었잖아. 그녀는 소리친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그녀의 부모가 받는 연금이 그녀의 연봉의 3배에 달한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건 불공평하다고. 엄마 아빠는 자기들밖에 모른다고. 우리 생각은 눈꼽만큼도 안 한다고. 토니 블레어 그 새끼도 개새끼였는데, 이번에 또 공화당 뽑았지? 라고 소리지를 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공연장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이 참 쓰렸다.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 것처럼 가벼운 태도로 일관하던 산드라와 케네스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렇지만 로지, 그건 니가 원한 일이었잖아. 바이올린은 니가 어릴 때부터 하고 싶어했던 일이잖아."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하자 어느 순간 로지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지른다. "그건 17살 때 하고 싶었던 일이잖아! 왜 나한테 바이올린 잘한다 잘한다 했어? 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계속 부추겼어? 거기서부터 모든 게 잘못된 거라고!"


산드라와 케네스의 세대에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그리고 마흔이 다 된 지금 자신에겐 돈도 남편도 자식도 없다며 화를 내는 로지에게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딸은 "아니, 돈이 인생의 전부야!"라고 소리 지를 정도로 인생의 낭떠러지까지 몰려 있는 상태다. 로지의 말들에 공감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어 속이 따끔거릴 때, 산드라가 말한다. "사다리를 부셔버렸다고? 있는 사다리 타고 올라간 거 아니야. 우린 사다리를 만들어서 올라갔어."


1980년생 작가가 놀라운 건 바로 이 지점부터다. 어쩌면 로지가 토해내는 대사들은 우리 나이 또래의 작가가 충분히 쓸 수 있는 대사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우리 부모 세대를 이해하는, 혹은 그들의 세대와 지금의 젊은 세대 간의 화해를 시도하는 연극의 후반부는 적당히 씁쓸하고 또한 적절히 유쾌하다. 모든 게 엄마 아빠 때문이라고, 엄마 아빠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고 화를 내는 로지에게 케네스는 말한다. "로지, 우린 너의 부모일 뿐이야." 그의 말이 맞다. 그녀의 인생은 로지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부모들이 자신이 그렇게 살도록 부추겼다고, 그렇게 이끌어갔다고 화를 내지만, 산드라는 말한다. "왜 그 때 우리에게 대들지 않았어? 싫었으면 씨발- 이라고 했었어야지. 내가 니 나이 때엔 우리 엄마 아빠한테 얼마나 대들었는데."


이 연극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산드라와 케네스에 의해 시종일관 유지되는 유쾌한 분위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산드라 역의 전혜진이 애드립인지 대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치는 대사들은 가히 압권이다. 그래서 연극의 마지막 장면 역시, 너무도 산드라와 케네스 다운 모습으로 장식된다. 역까지 차로 데려다 달라는 로지의 말을 듣지 못하고ㅡ혹은 듣고도 못 들은 척하며ㅡ 춤을 추는 산드라와 케네스를 보며 결국은 로지마저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마는 순간, 산드라와 케네스가 타이타닉 흉내를 내며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바로 그 순간, 세대 간의 두터운 벽도 어깨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도 한순간이나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걸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거구나, 했다.



그래서 결론은.

전혜진은 천상 연극인이더라. 정말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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