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day
- Total
pencilk
김중혁, 『뭐라도 되겠지』 본문
![]() |
|
1.
책장의 책 사이에는 내 일기장도 몇 권 꽂혀 있다. 일기의 내용은 정말 가관이다. 스무 살 무렵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오늘은 친구 아무개와 당구를 쳤다. 내가 이겼다. 저녁에는 친구 아무개와 함께 <영웅본색>을 보았다. 영화를 다 보고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새벽 1시쯤 취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일기는 젊은 시절의 고뇌와 허무를 표현하기 위해 모든 글에서 감정을 없애고 오로지 정보만을 전달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한 젊은이가 겪게 된 마음의 고통을 ‘드라이하게’ 드러내고 있다, 라고 누군가 과대포장해준다면 모를까 대충 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놀고 있는 젊은이의 삶일 뿐이었다. 도대체 이렇게 한심한 일들의 연속을 왜 종이에다 기록해두었을까. 술에 취해 멍청한 일기를 쓰고 있는 이십 대의 나를 멀리서 바라보면 참으로 한심해 보인다.
시간은 늘 우리를 쪽팔리게 한다. 우리는 자라지만, 기록은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기록은 정지하기 때문이다. 자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쪽팔림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쪽팔림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경고, 이 글은 글쓴이의 쪽팔림을 막기 위해 다 읽고 난 후 5초 뒤 종이 위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5, 4, 3, 2, 1”이라는 경고가 실현 가능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
인생이 예순부터라면, 청춘은 마흔부터다. 마흔 살까지는 인생 간 좀 보는 거고, 좀 놀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지 오리엔테이션에나 참가하는 거다. 그러니까 마흔 이전에는 절대 절망하면 안 되고,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체념해서도 안 되는 거다. 마흔이 되어보니 이제 뭘 좀 알겠고(알긴 뭘 알아, 라고 호통치실 어른들 많겠지만) 이제 뭘 좀 해볼 만하다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이제부터는 계급장 떼고, 스펙 떼고, 출신 학교 떼고, 제대로 한번 붙어볼 생각이다.
3.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고, 어제와 오늘의 변화가 10년 동안의 변화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바뀐다고 나까지 급해질 필요는 없다. 급한 건 세상만으로 충분하다. 새해에 세운 나의 계획을 점검해본다. 너무 도전적인 것은 아닐까. 너무 빨리 걸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목표가 너무 거창한 것은 아닐까. 하루는 24시간이고, 한 달은 30일이고, 1년은 12달이다. 시간은 충분하다. 우리의 목표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성실하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조금만 더 행복해지면 된다. 주름을 만들듯 천천히 내 속도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4.
일본의 동화작가 고미 타로의 책 『어른들(은, 이, 의) 문제야』에는 나처럼 산만한 사람들에 대한 글이 나온다. “저는 마음이란 산란해지기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란해지지 않는 마음은 이미 마음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마음 심心이라는 글자를 좋아하는데, 특히 그 글자의 생긴 모양이 시선을 모읍니다. 권權이나 군軍 같은 글자는 획들이 모두 확실하게 붙어 있지만 심心은 각각 떨어져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산만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마음을 갖지 말라는 뜻이며, 깜짝 놀라고, 두근거리고, 용기 없이 우물쭈물하는 등의 인간적인 감정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몇십 년 동안 억울하게 뒤집어썼던 누명을 벗어버린 느낌이었다. 산만해도 괜찮다고, 산만한 게 나쁜 건 아니라고, 고미 타로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5.
우리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시절에 발견했던 온전한 기쁨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료한 일이다. 어린 시절에 온전한 기쁨을 충전해두지 않는다면 길고 긴 어른으로서의 시간을 버티기가 쉽지 않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어른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어떤 일에서건 온전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6.
나는 가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오던 그 시절을 생각하고는 혼자 웃는다. 그런 완벽한 시간이 다시 올까.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고, 시간은 너무 많이 남아 있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몸을 움직이며 다치고 부딪치고 깨지고 다시 도전하고 실패하고, ‘실패해도 상관없어, 다시 도전하면 되니까’라는 마음으로 다시 부딪칠 수 있는 여유가 마음 가득히 부풀어 오르는, 그런 시간이 다시 올까.
+
제목부터가 지금의 내가 읽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책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여유와 용기, 배짱 같은 걸 주었고.
'THINKING > 책,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0) | 2013.05.10 |
---|---|
김애란, 『비행운』 (0) | 2013.05.08 |
조너선 샤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2) | 2013.05.03 |
빈센트 반 고흐, 『고흐의 편지 1』 (0) | 2013.04.15 |
김연수 ・ 김중혁, 『대책 없이 해피엔딩』 (0) | 2013.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