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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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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pencilk 2006. 4. 11. 19:42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국내도서
저자 : 공지영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1999.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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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까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2.

결국 안되니까 나는 그걸 꿈꾸었던 모양이야……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꿈은 더 절실했던 거야. 막상 그렇게도 살 수 있게 되니까, 난 겁이 난 거야……


3.
거기 첫문장 봤어? 나 그 문장 때문에 그 책 샀구 그래서 다 읽었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로 시작하는 문장 말이야. 본 거야? 응. 그래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언니 생각을 알고 싶어.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지나고 보면 모두 아무것도 아니야. 그 여자는 밥맛이 달아나는 것을 느끼고는 무선전화기를 목과 어깨 사이에 낀 채 밥그릇과 국그릇을 개수대로 옮기며 말했다. 그래? 그런 걸 언니는 벌써 알고 있었다는 거야?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난 몰랐어, 언니. 사랑하구 결혼하구 애낳구, 가계부 쓰구, 집 늘리구 그러는 거 나는 그런 게 목숨이라도 걸어야 하는 일인 줄 알았던 거야. 그래서 결혼할 때 시댁에서 반대한다고 우리 남편이랑 도망까지 쳤던 거야. 아이 낳을 때 열 시간이나 진통하면서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아플 바에야 차라리 누가 날 좀 죽여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그래도 이를 악물고 참은 건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어서 그랬던 거였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라니…… 언니, 나는 산다는 게 싸워서 무언가를 얻어내야만 하는 건지 알았어. 이를 악물고 참아서 무언가, 고난 끝에 무언가, 설사 행복이 아니더라도 무언가가 오는 것이라고,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기쁘고 즐겁지만은 않아도 그래도 소중한 것일 거라고. 그런데,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듣고 있어? 언니, 뭐라고 이야기 좀 해봐……


4.

그 여자는 이제 안다. 오늘의 날씨와 바람의 강도 그리고 통장에 남은 잔고가 같은 음악을 얼마나 다르게 들리게 하는가를. 어느새 나트륨등이 노랗게 피어나고 그 아래로 할랑할랑 벚꽃이 지고 있는, 가끔 그 여자로 하여금 맨발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던 그 광장, 광장 또한 마음의 조명을 받아 어떻게 다른 빛깔로 변해가는가를.

- 고독


5.

그는 홀린 듯한 기분으로 아내를 따라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점점 더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젠장,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비까지 내려준다면 앞뒤 구성이 콱콱 맞을 터였다. 신혼여행 때 비가 내리고 그 다음 이혼여행 때 다시 비가 온다면, 한번은 흰 배꽃이 보이고 한번은 낙엽이 지는 가을이라면 그는 감독에게 어쩌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ㅡ너무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이즈음 들어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는 어쩌면 삶은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헤어지는 날에는 비가 내리고 처음 갔던 곳에서 다시 이별을 하고 그런 상투적인 일들이 실제 삶에서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는 걸. 하지만 사람들의 입맛은 이제 변해있어서 영화는 진실에서 오히려 멀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삶은 점점 더 앞뒤가 분명하게 드라마틱해지고 영화는 점점 더 알 수 없게 복잡해지고.


6.

"...삶은 언제나 지나간 다음에야 생생해지는 거라는 걸 나는 이제 알 것 같아요."

- 길


7.
나는 빨리 늙어버릴 거야. 연금을 타면 제일 먼저 흔들의자를 사겠어. 그것을 베란다에 내다놓고 하루종일 앉아 있을 거야. 시간이 얼마나 느리게 흐르는지를 느끼면서 내내 거기 앉아 있을 거야…… 아마 생각하겠지. 이렇게 허망해질 것을 왜 그렇게 볼이 빨개지도록 뛰어다녔을까. 나는 거기 앉아서 내 젊은날의 욕망을 비웃을 거야. 하지만 내게 그런 시간이 남아 있을 거라는 꿈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욕망을 지금은 소중히 여기겠어. 적어도 실장 자리에는 오를 거고, 적어도 내 이름으로 된 브랜드 하나쯤은 차리고 싶다구.
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고 그가 말했다. 젊음과 시간, 그리고 아마 사랑까지도. 기회는 결코 여러번 오는 법이 아닌데, 그걸 놓치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우리는 좀더 눈을 크게 뜨고 그것들을 천천히 하나씩 곱게 땋아내려야 해. 그게 사는 거야. 아주 작은 행복 하나를 부여잡기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사는지 너는 아니? 진짜 허망한 건 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휩쓸려가는 거라구. 너는 늙어서 흔들의자를 내다놓고 앉아 그걸 생각하며 울게 될 거야.


8.

감상으로 혹은 연민으로 일을 저지르기에 나는 이미 많은 나이를 먹어버렸다. 그가 대학 졸업 무렵의 깊은 실연의 상처 때문에 오년을 해외 지사에서 자신의 젊은 시간들을 곱씹으며 보냈다는 말들을,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는 낡은 술집에서 오래오래 수줍고 서글프게 고백했을 때, 나는 사실 하품이 하고 싶었다. 그 여자하고 결혼했더라면 너는 아마도 그 상처를 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오년을 떠돌았겠지. 사랑이라든가 결혼이라든가, 그건 그런 거야. 영원은, 맹세하는 찰나에만 완성될 뿐이지. 나는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지금 입고 있는 이 바바리에 술을 쏟을 뻔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를 보내고 나서 나는 기특하게도 한참 동안 담담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슬픈 거야. 그 부피만큼의 눈물을 쏟아내고 나서 비로소 세상을 다시 보는 거라구. 너만 슬픈 게 아니라…… 아무도 상대방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그것을 닦아내줄 수는 있어. 우리 생에서 필요한 것은 다만 그 눈물을 서로 닦아줄 사람일 뿐이니까. 네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해.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나던 날 그는 내 차에 앉아 그렇게 말했다. 니 눈믈을 닦아주기에 나는 너무 해야 할 일이 많아, 하고 나는 말해버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겁이 났던 것일까.


9.

나는 계단을 내려서는 동안 어둠에 익어버린 눈으로 차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문득 아이를 보고 있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아주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동대문이나 광장 시장에 나가서 부자재로 쓰일 단추나 특이한 모양의 지퍼나 레이스를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화점에 나가서 우리 브랜드의 어떤 옷들이 어떤 계층에게 어떤 선호도로 팔리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는 직장을 위해서도 아니고 아이를 위해서도 아니고 어머니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나를 위해 쓰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아이는 나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 것이다. 잠들기 전에 애초부터 없던 레고 기차바퀴가 없어졌다고 할머니에게 떼를 쓸 것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달래는 할머니에게 결국은 엉덩이를 한대 얻어맞을 것이고, 엄마가 올 때까지 절대로 자지 않겠다고 골목이 보이는 싸늘한 베란다에 나와 고집스럽게 서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내리덮이는 눈꺼풀을 비비며 내가 없는 빈 침대로 기어들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도 점차로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떠난 빈자리도 삶의 일부라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언제나 제 시간에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고 싶은 어미의 마음과 보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아무리 허공에서 만난다 해도 이 세상에는 기필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10.
사진촬영을 끝낸 신랑이, 긴 드레스가 버거운 신부를 데리고 싱글거리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희망으로 빛나는 이 길을 당신들도 언젠가 절망으로 기억할 날이 있을 것이다. 희망으로 빛나지 않는 길은 결코 절망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길의 탓은 아니지만, 경계하라! 그 변덕스러운 삶의 갈피를. 언젠가 음악이 멈추고 무도회가 끝난 것처럼, 귓속으로 먹먹한 정적이 스며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시금 경계하라! 불행조차도 고여 있지 않는다는 진실을.

-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11.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나는 우회전을 하느라 바쁜 손으로 겨우 전화기를 든다. 남편이었다. 주유소에 들른 길이라고, 햇살이 맑은 좋은 봄날이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한다.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그 순간 내 가슴은 서늘해진다. 이 사랑, 이 가슴이 저밀 것 같던 사랑도 그것이 그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허망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내 사랑에 대해 자유로워진다. 유리창에 어리던 그의 눈빛이 지워지고 아주 다는 아니지만 적어도 얼마간은 나는 홀가분해진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나는 그를 더 사랑할 수 있다. 주유소에 도착한 후가 아니라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어 차가 멈추어 있는 짧은 시간에도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낯가림과 수줍음 그리고 얼마간의 계산을 통해 절대로 하지 않으려 했던, 투명한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랑은 사실 허망하므로 이 순간만이 전부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예전의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 나는 사랑하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12.
몇년 전 처음으로 함께 맥주를 마시며 그는 내게 물었다. 사랑해도 되는 거지요, 제가 이렇게 마음을 다 줘도 되는 거지요. 그는 수줍었고, 조금 떨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그 순간의 내 마음을 기억한다. 싸늘히 식어내리던 마음,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어떤 상처 때문에 그러는지 알고 있었지만, 아니, 아는 정도가 아니라 깊숙하게 느끼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나는 대답했다. 그건 제가 대답할 성질의 질문이 아니군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것이어야만 해요. 당신만이 그 사랑을 시작할 수 있고, 지킬 수 있고, 그리고 부수어버릴 수 있어요, 내가 아니라.
그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서운한그에게 더욱더 냉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나 역시 그러리라고. 그가 나를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나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나 자신의 것으로 가지겠노라고.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사랑하겠다고. 그러니 나를 위해서라면 사랑 따위도 버리겠노라고.


13.

가끔 말은 말 자체의 덫에 걸린다. 대개는 개념어보다 감정어가, 명사보다는 형용사가 그렇다. 형용사나 감정어에는 각기 다른 개인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런저런 기억에 의해 대개는 왜곡되고 과장된다. 서로 미묘하게 차이나는 나름의 내용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가 예쁘게 보이는 날 멋있다고 말하고 여자들은 남자가 좋아 보이는 날, 예쁘다고 표현한다. 각기 제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뜻은 본래의 의도로 투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속세의 삶에서는 산이 산이고 물이 그저 물일 수 없는 것이다.


14.

그러나 그 이후에는 상처가 상처를 입혔다. 나 자신이 나에게 상처입힌 것이다. 누구도 나에게 상처입히지 않았다. 다만 내가 나를 못살게 굴고 내가 나를 찌르고 할퀴었을 뿐. 행복도 불행도 그래, 모두 나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그 이전에, 마치 태초에 말씀이 있었듯이 원인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한에서 그렇다. 나는 지금 그 원인자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내가 스스로에게 상처입혔다는 말은 그에 한해서만 유효하다. 나는 천주교 신자였고, 한때 미사시간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라고 말하며 가슴이 메어온 적도 있었지만, 적어도 모두가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 탓이라고 말해야 할 그들은 절대로 내 탓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내 탓이 없는 것은 아니다.


15.

그리고 몇년이 지난 후, 나는 우연히 뮈쎄의 시를 읽는다. 이 세상에서 내게 남겨진 유일한 진실은 내가 가끔 울었다는 사실뿐이다. 이 사람, 뮈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끔 운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 조용한 나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