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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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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은 옷을 입은 채로는 바닷물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옷을 입은 채 바닷물에 빠지는 것도 인생이죠. 마음속에 금지를 가지지 말아요. 생은 그렇게 인색한 게 아니니까. 옷을 말리는 것 따윈 간단해요. 햇볓과 바람 속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죠. 살갗이 간고등어처럼 좀 짜지기는 하겠지만."
2.
침대에 앉아 창 바깥을 내다보는데, 어느 순간 내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오후 네시였다. 권태가 그만 슬픔으로 변해버리는 시간. 모든 것이 무상하고 남루해지고 이유 없는 슬픔이 몰려들었다. 허공중의 빛이 돌아서는 듯 산그림자가 바뀌고 있었다.
3.
"……옳지 않다 해도, 어쩔 수 없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기로 했어. 문제는 내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 뿐이야. 다른 건 몰라도 말이야, 사랑만은 교훈적으로 하는 게 아닌 거 같아. 그건 말이야……."
"실존적으로 하는 거지……."
(중략) 어쨌든, 사랑은 교훈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존적으로 하는 거다. 어느 시에 그런 구절이 있었다. 서른 살이 넘으니 세상이 재상영관 같다고. 단 하나의 영화를 보고, 보고, 또 보는 것만 같다고. 대체 우리는 어떻게 성숙해야 하는 것일까…… 선은 텅 비고 추상적이기만 하고, 일상은 자고 먹고 섹스하고 사냥하는 욕망의 습관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니.
4.
왜 이 땅에선 개인적인 모랄이 생기지 않는 걸까…… 왜 젊었을 때는 다르게 반항한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똑같은 것을 추구하게 될까…… 왜 좀더 다양한 생이 없을까. 개인적인 창의성의 부족이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달리 수긍할 만한 변명거리가 있을까…… 답답해져 에어컨이 켜져 있는데도 차창을 활짝 내렸다. 그리고 두 팔을 바깥으로 내저었다. 안개와 밤이 뒤섞인 습기차고 텁텁한 공기가 젖은 천처럼 맨팔에 감겼다. 가슴은 여전히 답답했다. 나라는 형체는 다 녹아버리고 눅눅한 습기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 누가 나를, 녹는 비누처럼 사라져가는 나를 이 탁한 나날 속에서 건져내어주었으면…… 나 아닌 것들은 다 털어내버리고 오직 나만으로 구별되고 싶었다…….
5.
"좋으세요? 이 삶이?"
"물론."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사는 것이 걱정되지 않아요?"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살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걸. 당신 이런 이야기 알아요? 들판에 풀려 있는 양떼들을 가둘 울타리를 나무를 가장 적게 들이고 치는 방법."
"……."
"난 내 몸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내가 바깥이 되기로 했어요. 구질구질한 세상을 가장 간단하게 가두는 방법은 나 자신이 바깥이 되는 것이지. 아웃사이드의 철학이요."
어차피 옳은 인생의 모델 따윈 있을 리 없었다. 자기에게 맞는 생이 있을 뿐이었다.
6.
벌써부터 그가 보여주는 거리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 거리감이란 그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려는 내가 만들기 시작한 거리감이었다. 그는 다만 한결같을 뿐이었다.
7.
"생의 불행이나 허무나 권태 따윈 이미 자명한 사실이오.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건 가능한 한 경쾌해지는 것이오."
"고마워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주 심심하면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좋을 텐데. 편지를 쓰거나. 수신인은 마을의 우체국장으로 하고."
"그렇군요."
마침내 나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는 그제서야 만족한 듯 전화를 끊겠다고 했다.
"잘 다녀오세요."
전화를 끊고 일어서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인간의 불행은 자명한 사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이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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