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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aily Life

감정과 언어

pencilk 2003. 4. 22. 03:40

재수하고 수능이 끝난 직후부터 1학년 때 썼던 일기장을 꺼내서 다시 읽어보았다. 굉장히 재미있기도 하고, 내가 당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들이 신기하고 낯설기도 했다. 그리고,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일기만 봐도 훤하게 그 때 내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알겠는데, 당시의 나는 죽도록 부인하고 있었다.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로.

사실 일기를 보다가 좀 놀랐다. 너무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저렇게 흔들렸었나? 당시에 나는 내 감정을 최대한 숨긴다고 숨겼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그 사람도 다 알았을 것 같다. 그 애도 알았을 지도. 좀 민망한 건 지금도 두 사람 다 연락이 된다는 거다. 당시의 나는 자주 연락하던 그 인간들이 군대에 가버리면 외로움에 치를 떨 것 같아서 겁내고 도망치고 연락 끊어야 하나 등등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온갖 삽질이란 삽질은 다 하고 있었는데, 현재의 나는 군대에 간 두 놈(;)과 여전히 연락을 하며, 그리고 그 두 놈 없이 아주 잘 살고 있다는 거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이런 건가? 그 때의 나는 뭐가 그리 두려웠었나. 그래도, 그 때보다는 지금이 나아진 건가.


언어는 참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당시의 내 일기에서도 나는 그것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온라인 상의 일기도 아닌 그저 혼자 쓰고 혼자만 볼 수 있는 일기장에도 그 어떤 단어로 규정짓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이 여실히 드러난다. '좋아한다'라는 표현만은 죽어도 쓰지 않겠다는 듯, 당시의 내 일기는 그렇게 도망치고 피하고 부인하고 있다.

사실 언어로 규정 짓는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말로 내뱉는다는 것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어떤 종류인지 모르는 감정에 대해 '나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라고, '좋아한다'라는 단어로 규정지어 보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그 언어의 노예가 된다. 그 때부터 그 감정은 '좋아한다'와 '아니다'로 양분되어 선택을 기다린다. 그리고 '좋아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하고 난 후에 그 사람을 보게 되면 그 언어에 갇혀서 정말로 그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된다.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웠다.

중학교 2학년 때쯤이었을 거다. 나도 어렸을 때는 '좋아한다'까지의 감정이 아니어도, '쟤 괜찮더라' 정도의 감정일 때 친구한테 그런 얘기를 잘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친구한테 말하고 나면 괜히 그 애만 옆에 지나가도 오버하면서 말 걸어봐- 뭐 이런 식으로 부추긴다고나 할까. 그런 게 너무 싫었었다. 그냥 괜찮더라-정도인데 거기서 부추김으로써 감정이 커간다는 것이, 마치 주위 분위기에 휩쓸려서 좋아하게 되는 것 같아서 너무 싫었다. 그래서 중 2 때쯤부터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었다. 이제 절대, 누구를 좋아하게 되거나 관심이 가더라도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티도 안 내야지.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그 때부터 나는 내 감정을 철저히 혼자 일기에만 털어놓고 친구한테는 말하지 않게 되었다. ㅡ 물론 모든 감정에 대해 그런 것이 아니고 누군가 좋아한다거나 호감이 간다거나 하는 부분에서만 ㅡ 그리고, 나이가 들고 나서 문득 깨달은 내 모습은 내 감정을 나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에 아, 나는 그 사람을 좋아했었구나-라고 깨달았다. 그게 재수 때 일이다. 그럼 도대체 몇 년 전? 그걸 이제 깨달았다고? 누가 들으면 황당할 거다. 당시에 그 사람과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사귀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오빠를 좋아했던 또 다른 친한 친구가 안됐어서 울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그 친구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내가 그 오빠를 좋아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친구와 그 오빠가 너무나 잘 어울리고 곧 사귀게 될 것 같다고 늘 생각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몰랐다. 그리고 갑자기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나, 그 오빠 좋아했었구나. 3년만에 깨달았다...(장하다.-_-)

대학 1학년 때의 일기를 보면서도 그런 느낌이었다. 흠, 난 그 사람을 좋아했었던 것도 같군. 아니 좋아했네. 근데 당시엔 몰라서 다행이야. 사겼으면 정말 암울했을 거야.(;) 뭐 그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지금 느끼는 이 씁쓸함은, 좋아했었는데 놓쳤다거나 하는 그런 안타까움은 전혀 아니다. (그럴 정도로 좋아했던 건 아니라서. 그래, 좋아했다는 표현보다는 엄청나게 흔들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지도;) 그냥, 어째서 당시에는 이렇게나 내 감정에 대해 몰랐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내 감정을 모른 채, 또는 알면서도 모른 척 속인 채 살아갈 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게 씁쓸할 뿐이다.


나는 나의 문제점을 아주 잘 안다.
첫번째 나의 문제점은, 나에게 아무리 끊임없이 작업이 들어와도 나는 날 좋아하는 거라고는 왠만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거기에는 단계가 있다. 첫번째 단계는 흠, 다른 여자들한테도 다 이렇게 해주겠지. 두번째 단계는 내가 만만한가 보지. 세번째 단계는 그냥 호기심이지 진정으로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 거야. 뭐 이런 식; 지인들은 내가 둔하다고도 하는데, 생각해보면 난 둔한 건 아닌 것 같다. 느끼긴 느끼는데, 그게 날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끊임 없이 부인한다는 게 문제다. 나에게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이상 나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주위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사람 너 좋아해'라고 말해도 나는 믿지 않는다.-_-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나는 그런 사람들이 나에게 고백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다는 거다. (그 비법이 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우리 오빠가 '니가 그런 말 못하게 만들잖아'라고 말해서 그런가보다 하는 것 뿐; 그리고 실제로도 사귀자-라는 소리 내 앞에서 내뱉은 사람은 정말 없다;)

두번째 나의 문제점은,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이 가거나 좋아하게 된다 해도 그것 역시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다. 죽도록 부인하거나 이러지 말자, 혼자 오버야, 안돼 등등.-_- 내가 짝사랑은 절대 안 할 거라고 바락바락 우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 구구절절 늘어놓았듯이, 당시에는 그렇게 죽도록 부인하다가 한참 후에야, '아, 나 그 사람 좋아했었던 것 같군'이라고 깨닫는 거다.


지금까지 내가 연애를 못하는 이유의 구구절절한 설명이었다.(;)
(->이런 결론을 내려던 게 아니라고!)


 
愛동국心   03/04/22
허허허.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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