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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천안문 사태 본문
월드컵 본선에 처음으로 출전한 중국이 첫 경기를 한 6월 4일은 공교롭게도 6. 4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지 1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중국 공안당국은 월드컵 대회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이용한 반정부 시위 발생에 대비해 베이징 시내 경비를 강화하는 등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89년 중국 권력구조의 물길을 전환시킨 천안문 사태는 1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
시위의 발단
1986년 12. 9 민주화 운동 이후 출범한 등소평-조자양 체제1)는 정치적으로는 소극적 개혁을 추진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적극적인 개혁, 개방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경제개혁 정책이 경기 과열, 통화팽창, 원자재 및 상품 부족 심화 등의 부작용을 일으키면서 조자양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의 입지가 약화됐다. 결국 긴축재정을 주장한 보수파 이붕의 영향력이 커졌고 지도층에 의한 정치개혁 가능성은 희박해져 갔다. 여기에 당정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고급간부 자제들의 각종 특혜, 부조리 만연은 지도층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4월 15일 호요방2)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국민들의 당,정에 대한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지식인들의 급진적 민주개혁 욕구가 폭발했다.
1989년 4월 17일 천안문 광장에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모였다. 호요방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87년 민주화 시위에 관대한 태도를 보인 후 강제 퇴진 당했던 호요방에 대한 재평가와 정치 민주화, 자유화를 요구했다.
시위는 지방대학에서도 일어나 4월 25일까지 전국 80여 대학에서 15만여 명이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특히 호요방 추도식 다음날인 4월 23일에는 북경 소재 21개 대학의 대표들이 모여 ‘고교임시행동위원회(후에 북경시고등학원학생자치연합회로 개칭)’를 설립했다. 이로써 중국 내 민주화 운동 확대를 위한 조직이 학생들에 의해 최초로 정비됐다.
피의 일요일
시위가 장기화되자 등소평은 4월 25일 당정치국확대회의에서 이 사태를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닌 '동란'으로 규정하고 단호히 분쇄할 것을 촉구했다. <인민일보>는 학생 시위가 계획적인 음모이며 이를 계속할 경우 체포와 처형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는 학생들을 자극해 4월 27일에는 천안문 광장에서 동란 규정 취소와 중국 당국과의 대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됐다.
1919년 중국 베이징 학생들이 일으킨 반제국, 반봉건주의 혁명 운동인 5. 4운동 70주년을 앞두고 일어난 학생 시위는 중국 안팎에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5월 4일 1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5. 4운동 기념식은 별다른 사고 없이 끝났지만 여전히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대화 요구에 정부측 답변이 없자 3000여 명의 학생들은 5월 13일 정오부터 천안문 광장에 텐트를 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젊은 여성이 두 손을 모아 자유의 횃불을 들고 있는 9m 높이의 자유의 여신상을 천안문 광장에 세웠다. 시위대 총지휘부는 외국기자회견을 열어 "현 정부는 대화 자격을 잃었으나 정부가 계엄령 철폐, 군대 철수, 민주화운동 참가 학생에 대한 보복 금지 보장, 신문 자유 실현 등 4가지를 응답하면 정부와 대화를 갖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틀 뒤 북경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30년만의 중ㆍ소 정상회담 취재를 위해 북경에 왔던 보도진을 통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전 세계에 그대로 전해졌다.
5월 16일 중ㆍ소 정상회담에서 조자양 총서기는 등소평이 현직에서 물러났으면서도 여전히 막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을 폭로한다. 17일 "학생의 애국적 열정은 매우 귀중하다"는 조자양의 천명을 계기로 천안문 광장의 시위는 100만 명 규모로 본격화된다. 시위대는 등소평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천안문 광장에서는 등소평 모형을 만들어 불태우고 "등소평은 물러가라"는 구호와 표어가 등장했다. 정치 민주화와 자유를 요구하며 시작된 시위는 등소평에 대한 분노가 커지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변했다. 조자양은 시위대를 무마하려고 했지만 정부 내 강경파3)와 시위대 사이에서 효과적인 조정책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5월 20일 오전 10시, 정부는 공산정권수립 이후 최초로 북경시 10개구 중 8개구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시위 열기가 시들지 않자 마침내 등소평은 강경 진압을 선택했다. 6월 3일 중국 인민해방군 최정예 부대와 탱크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밀려들었다. 이들은 시위대가 해산 명령에 응하지 않자 광장 양쪽에서 진입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흩어지고 지도자들은 체포됐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북경 시장 진희동의 보고에 의하면 이 때 민간인 3,000여 명이 부상당하고 200여 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희생이 초래됐다. 이것이 ‘피의 일요일’이라고도 불리는 6.4 천안문 사태다.
천안문 사태의 의미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듯 보이지만 중국 체제가 안고 있던 구조적 문제점이 사건의 실제 원인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정책와 정치구조의 차이였다. 80년대 이후 자유시장 원리의 도입, 서방과의 교류 확대로 경제는 자유화됐지만 정치적 자유는 철저히 억압됐다. 지식인과 학생들은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중국 지도부는 정치 자유화 때문에 붕괴됐던 구소련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당시 시위를 효율적으로 막아낸 상해시 당서기 강택민은 새로운 총서기로 선택됐지만 진압을 반대하다 사임한 조자양은 권력의 전면에서 밀려났다. 지도부의 분열은 그 후 정치를 얼어붙게 했고 중국 국민들의 관심을 경제발전에 집중시켰다. 중국 경제의 급격한 성장은 중앙과 지방 간 대립, 빈부의 차, 도시와 농촌 간 소득 불균형 등의 문제를 야기했고 이는 중국 내에 계층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시위가 일어난 지 11년이 지난 2000년, 미국의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지가 공개한 당시 중국 지도부의 회의 내용(일명 천안문 페이퍼)은 천안문 사태의 진상을 확인시켜주었다. 시위대 유혈진압은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등소평이 이붕 총리 등 강경파들의 지원을 받아 주도적으로 내린 결정으로 밝혀졌다. 또 군계엄령을 가장 충실히 집행한 공로로 강택민 당시 상해시 당서기가 당 총서기로 발탁됐으나 이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표결을 거치지 않고 8명의 원로들이 거수로 결정, 당규에 위배된 방식으로 선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천안문 사태는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대외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켰다. 천안문 사태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중국은 1993년 단 두 표 차로 호주에 올림픽 개최지를 내주어야 했다. 천안문 페이퍼 유출 사건으로 중국에 대한 국제 사회의 시선도 더욱 날카로워졌다. 천안문 사태는 인권 문제와 함께 오늘날 중국의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아직도 매년 6월 4일이 되면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는 천안문 사태 재평가를 요구하는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난다. 이 때마다 정부는 경계령을 내려 시위를 감시하고 강경 진압에 나선다. 이같은 긴장 상태는 천안문 사태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있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천안문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 등소평은 사항정치기본원칙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사회주의 견지, 민주적 전제, 공산당의 지도, 맑스 레닌주의 및 모택동 사상의 견지이다. 즉 경제면에 있어서는 국제사회에 대한 문호개방과 시장경제의 도입을 추진하되 정치면에 있어서는 모택동 이래의 일당 독재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노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2원주의 때문에 상기 4원칙을 지지하는 혁명 제1세대의 보수파와 경제 개혁과 정치개혁의 병행을 주장하는 제2세대의 개혁파 사이의 충돌이 일어났고, 그것은 마침내 1989년 6월의 천안문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2) 1989년 4월 15일 호요방 전 총서기가 급사했다. 당시 73세였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는 일주일 전인 4월 8일 정치국 회의에서 '당풍'을 둘러싸고 조자양, 이붕, 요의림, 양상곤 등 상무위원들과 격론을 벌이다 졸도했다. 호요방은 11살 때부터 모택동이 일으킨 '추수폭동'에 가담하고 대장정에 참가해 '영원한 청년'으로 불렸다. 그는 등소평의 충실한 대변자였다. 하지만 2년 전 학생소요를 단호히 제압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자신이 그토록 믿고 따랐던 등소평에 의해 총서기에서 밀려났다. 호요방은 등소평과 달리 정치개혁 쪽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한 때 학생들의 호응을 받았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그의 실각을 안타까워했고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즉각 행동에 나섰다.
3) 민주화운동에 대한 권력층의 태도를 보면 조자양. 호계립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와 이붕을 필두로 한 강경파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기본적으로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후자는 학생운동을 일부 불순분자의 책동에 의해 일어난 동란으로 보고 타협. 양보 불가의 강경 입장을 견지했다. 실제 국정을 좌우하는 당. 정. 군의 원로들은 거의 다 강경파에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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