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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리뷰]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pencilk 2010. 1. 21. 08:30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저
문학동네 | 2009년 09월


붕괴되어버린 한 '세계의 끝'에서 내가 만난 최고의 위안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한다고 착각하고, 때로는 사랑에 빠진다. 끝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두 사람 간의 오해는 결국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놓는다.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너에게 하나하나 다 설명하지 않았을 경우의 의사소통의 단절. 또는 설명을 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르는 상호 공감의 단절.

사람이 사람을 뒤흔든다. 사람은 결국 각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도 흔들리고 비틀거린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는 거라며, 서로가 서로를 휘청거리게 만들고 서로의 세계를 아낌없이 부순다. 그렇게 서로를 뒤흔들어 놓고서, 사람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기억들을 잊고 살아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불쑥불쑥 엄습해오는 기억의 파편들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간다. 가끔씩 그 파편들이 차마 빼낼 수 없을 정도로 심장에 깊이 박혀올 때면 주저앉기도 하지만, 또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걸어간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끝끝내 서로를 알 수 없는 너와 내가 만나 상처 받고, 때로는 위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자매편에 가까운 이 단편집에서 김연수는, 누군가를 만나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파동하고 그로 인해 하나의 세계가 부서지는 순간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 순간은 주로 너와 나 사이의 '소통의 단절'이 엄습하는 때이다. 그것은 때로는 언어의 장벽, 혹은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볼 여력의 부재不在에서 오기도 하고, 의도적인 망각 혹은 회피로부터 기인하기도 한다.

작가의 말에서 김연수는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물고문한 학생의 죽음으로 인해 한 순간 가족도 직업도 모두 놓고 지방 소도시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살아가던 한 노인의 자살 앞에서 그의 아들도, 십여 년이 넘게 매일같이 그를 봐온 도서관의 사서들도, 또 그가 그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상대인 '강'마저도, 그 누구도 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내겐 휴가가 필요해」) 갑자기 이혼하자고 말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 남편은 다시는 백합을 버리지 않겠다며 사랑한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경석은 점점 한국말을 잊어가는 그녀와 더 이상 소통할 방법이 없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바다를 봤다고 생각할지언정, 결국에 우리가 보게 되는 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너는 너만을 이해했을 뿐¹ 이라는 말이 지독히도 아픈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랑을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아내의 인도인 친구가 말한 "안 노래하면 안 삽니다"가 음정이 안 맞는 피아노는 팔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 연주하지 않는 피아노는 살(生) 수가 없다는 뜻이듯,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해도 '이야기'를 통해 그들은 친구가 되고 소통을 한다.(「모두에게 복된 새해」)

그래서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인물들은 소통을 시도한다. 자신의 삶을 그 전과 그 후로 나눌 수 있게 해줄 어느 한 시점, 즉 하나의 세상이 붕괴되고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려 하는 바로 그 지점,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의 끝이라 할 수 있는 그 곳에 서서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서른아홉 살의 미국인 여성 작가인 '나'와 통역을 맡은 '혜미'의 사이에 존재하는 '밤뫼'와 '밤메'와 '방미'의 간극, 그 소통의 벽은 케이케이를 잃은 나와 세 살 짜리 아들을 잃은 혜미의 '고통의 공감'으로 인해 무너진다.(「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그저 기억에서 밀어내고 부인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코미디언 안복남'으로 살았던 시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미선은, 비로소 아버지라는 한 인간의 삶에 들이닥친 한 세계의 붕괴를 이해한다.(「달로 간 코미디언」)
아니, 완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 존재하는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심지어 침묵까지도 어느 하나 편집하지 않은 채 듣고 또 들으면서, 그녀는 아버지의 인생을 그가 남긴 수많은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서 찾는다. 어느 날 사막에서 실종된 한 남자와, 남자를 이해하기 위해 한 시절의 사막을 향해 걸어간 한 여자, 그리고 그녀가 보내온 녹음 테이프를 통해 그녀가 사막에서 보게 될 빛과 어둠, 그리고 열기를 한때 그녀의 연인이었던 '나'가 소통하는 그 순간, 서로가 서로를 불현듯 이해하게 되는 그 순간에도 그들은 각자였다. 거기에는 그 남자, 그 여자, 그리고 나, 혼자뿐이었다.

작가는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반드시 서로를 이해해야만, 이해하는 데 성공했을 경우에만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끝끝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이해하기 위해,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와 '나'는 때로 '우리'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너를 다 안다고, 전부 이해한다고, 섣불리 위로하지 않는 대신 나는 너를 모른다고,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붕괴되어버린 한 '세계의 끝'에서 내가 만난 최고의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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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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