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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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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불을 껐을 때 어둠은 지독히 더디게 마디와 결들을 드러내더니, 이제는 낱낱의 틈들과 모세관들이 들여다보인다. 어둠의 속은 고요하다. 사물들은 둥들거나 각진 자신들의 희미한 윤곽 안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고요하지 않은 것은 내 기억들뿐이다.
2.
혼자서 너를, 그토록 방심하고 그토록 내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배어나온 너를,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어쩐지 신비롭게 느껴지는 너를 보고 있다는 게 지나친 행복이라고 느껴지던 저녁.
너는 천천히, 정확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사이사이 침묵하며 말했지.
난 말이지, 정희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것을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3.
가게를 정리할 무렵 어머니가 얻은 무릎 관절염은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아버지를 먼저 여읜 뒤 오빠의 집에서 조카들을 키우며 지내는 어머니를 찾아가 주름진 손을 잡을 때면 나는 은밀한 고통을 느꼈다. 늙어가는 사람은 점점 어린아이 같아진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화기를 움켜쥐고 '빨리, 신문지 갖고 와라! 아주 많이!'라고 울부짖던 어린아이가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삶이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에 철저히 회유되고 협박당한 사람의 얼굴로 어머니는 작은 방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의 살비늘 냄새를 맡고 있으면, 그녀에게 삶이 폭력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떤 희망에 그토록 교묘하게 회유당했을까. 가정의 평화. 아들들의 출세. 딸의 행복한 결혼. 오순도순한 노부부의 말년. 종내에는 무릎을 무너뜨려 계단조차 오르내릴 수 없게 만든 삶을 그녀는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4.
어두운 보도블록을 밞으며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인도의 움푹 들어간 곳마다 박혀 있던 얼음 조각들이 박명에 빛나며 생생히 살아난다. 걸음은 아래로 끌리고, 숨은 흰 불꽃처럼 흩어져 허공으로 올라간다.
고가도로 너머로 보이는 동쪽의 산등성이를 향해 나는 멈춰 선다. 땀이 식은 등으로 한기가 파고든다. 산등성이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있다.
삼촌이 그랬듯이, 인주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고요한 푸른빛을, 푸른 시간을. 밤의 비밀과 낮의 명료함이 맞바뀌는 지진 같은 떨림을. 피와 뼈까지 파랗게 배어드는 서늘함을. 잠든 사람들의 체온이 가장 내려가는 순간. 지표면이 차가워지는 이 순간.
돌아서서 집으로 걷는 이십여 분 동안 천천히 그 시간은 사라진다. 거리는 언제 어둠과 한몸으로 섞여 있었느냐는 듯 태연히 제 빛을 띤다. 비밀이 사라진 거리는 헐벗어 있다. 그 헐벗음으로 뭔가를 집요하게 다그쳐 묻는 것 같다.
5.
책장 옆의 낡은 책상에 전화기가 놓여 있다. 발신자 창이 없는 구식 모델이다.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을 따라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지난 새벽 기록된 전화번호를 누른 뒤 기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책상 위의 전화기가 날카롭게 울리기 시작한다.
뭔가.
나는 입속으로 묻는다.
그 시간에, 거의 완전한 타인인 나에게 전화한 이유가 뭔가.
이곳에서 지난 밤을 보낸 건가. 난로도 없이. 그 얇은 트렌치코드 차림으로?
나는 휴대폰 폴더를 접는다. 잠시의 시차를 두고 전화벨이 끊기자, 여러 조각으로 깨어졌던 정적이 서서히 서로의 몸을 핥으며 물처럼 하나가 된다.
6.
바람이 분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허공을 할퀸다. 긴 코트 차림의 여자들이 길고 곧은 머리칼을 나부끼며 종종걸음 친다. 어디선가 날아온 흰 전단지가 택시 앞유리의 와이퍼에 걸려 세차게 퍼덕거리다 찢기며 다시 날아간다.
7.
있지, 새벽은 이상해.
밤도 이상한데…… 새벽은 더 이상해. 십 년쯤 잠을 안 자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이상해져서 새벽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걸까? 밤에는 결이 있고 마디가 있고 틈이 있는데…… 새벽은 안 그래. 어떤 물결이야. 어떤 핏줄, 어떤 생명 같은 거…… 두근거림 같은 거.
8.
비명 같은 바람 소리가 밤새워 창틀 사이로 파고들던 그 집은 없다. 살아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나아가야 했던 그 시간은 없다. 그림 없이, 삼촌 없이, 오후의 산책과 따뜻한 김이 오르는 감자 소반 없이도 모든 것이 그대로이던 시간은 없다. 보이는 모든 사물이 주먹질하듯 내 얼굴을 향해 달려들던 시간, 힘껏 부릅뜬 내 눈을 통과해 흩어지던 시간은 없다.
9.
무한히 번진 먹 같은 어둠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삼촌은 말했지.
생명이란 가냘픈 틈으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한테서 생명이 꺼지면 틈이 닫히고,
흔적 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생명이 우리한테 있었던 게 예외적인 일, 드문 기적이었던 거지.
그 기적에 나는 때로 칼집을 낸 거지. 그때마다 피가 고였지. 흘러내렸지.
하지만 알 것 같아.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는 걸.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걸.
……지금 내가, 그 얼음 덮인 산을 피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
전경린도, 김영하도, 심지어 김훈조차 주지 못했던 느낌을, 한강이 주었다.
그녀의 글은 처음 접한 거였는데, 조금 읽다 보면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보여서 읽다 마는 책들이 늘어가던 나를 간만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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