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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밑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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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밑줄

pencilk 2011. 10. 3. 18:33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국내도서
저자 : 박정석
출판 : 시공사(단행본) 201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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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을 떠나 동해안의 시골 마을에 집을 짓고 산 지 1년 반이 넘어서면서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것은 원래 있던 좋지 않은 증세ㅡ되는 일 없이 이 나이쯤 먹게 되면 흔히 호소하는 초조함과 집착, 분노ㅡ의 점진적인 완화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증상, 전자보다 결코 낫다고 볼 수 없는 또 다른 병적 증상의 심각한 진행에 불과함을 깨닫게 됐다.


간단히 말해 나는 식물 비슷하게 변해버렸다.


"저 소 보이지? 눈만 끔벅거리면서 온종일 저렇게 드러누워 꼼짝도 하지 않아. 풀을 뜯어 먹고 잠을 자긴 하지만 스스로 동물이라고 여기지 않는 거야. 주변에 피어 있는 꽃이나 나무처럼, 점점 식물을 닮아가고 있는 거지. 송아지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오래전 안데스산맥 어디쯤에서, 콜롬비아 인 목동이 초원에 누워 있는 소들을 가리키며 해준 말이다. 동물로 태어난 생명의, 소위 식물화 현상.
중증의 게으름과 동력 상실, 무감각의 합체쯤으로 설명할 수 있는 퇴행이었다.


"고등어와 시금치를 많이 먹어봐. 틈나는 대로 햇볕을 쬐고 비타민B를 충분히 섭취하면…."


이런 조언을 들었다. 햇볕을 쬐라고? 시골에 내려온 이후 거의 매일 마당일을 하느라 일광욕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마당에 깐 잔디가 자리를 잡아가고 구석에 닭장까지 지으면서, 내 증세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태평스러운 전원생활에 익숙해졌고, 그 결과 나는 인지적인 병신 비슷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자기 집 정원 가꾸기에 몰두하면 할수록 바깥세상에 대해서는 점점 무관심하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한 후 다음의 일들을 차례대로 수행했다. 화단에 물 주기, 개와 닭들에게 밥 주기, 닭이 낳은 알 수확하기, 개똥 치우기, 잡초 뽑기.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이 모든 일을 눈감고도 할 수 있을 듯했다. 물 주기, 밥 주기, 알 거두기, 개똥 치우기, 잡초 뽑기. 겨울이 되면 채소밭 신경 쓸 일이 없고 닭들이 알을 낳지도 않으니 더욱 단순해진다. 밥, 똥, 밥, 똥, 밥….


기계인가, 사람인가.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회의를 느끼리라 생각한다. 잔잔한 강물처럼 조용하지만 꾸준하게 흘러가던 어느 날 오전,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 점심을 먹고 물컵 또는 커피잔을 딸그락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외출 후 집으로 돌아와 어제 입었던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순간,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워 머리맡의 스탠드 불을 딸깍 끄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데자부를 경험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 상황에 깃든 작지한 무시무시한 비극을 짧게나마 인식하게 된다.


수없이 했던 일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으며 내일 역시 똑같으리라는 것을. 어서 빨리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사실 광기에 휩쓸리지도 않을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에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더욱 참기 힘들다는 것을.



2.
이런저런 일을 해야지 생각했지만 정작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부터는 다이어트를 시작하리라 매일 아침 새롭게 결심했다. 운동을 위해 가격 비교 사이트를 뒤져 가며 구입한 스트라이다(접이식 자전거)는 뽀얗게 먼지로 뒤덮인 채 차고 구석에서 잊혀져 버렸다.
무기력한 생활이 부끄러웠지만 수치심은 잠깐뿐이다.
최악은 바로 그 부분이다. 인지적 병신에 이어 감각적인 병신마저 되어간다는 것. 언젠가부터 부끄러움도, 슬픔도, 예전처럼 강렬하지 않았다. 자정 넘어 라면 한 그릇 먹어치우고도 별 죄책감 없이 쿨쿨 잠이 들었다.



3.

여행이 길어져 생활로 변할수록 건축물의 추상적인 아름다움이나 이국의 공간적 경험처럼 비일상적인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감동은 점점 줄어들고 이보다 훨씬 작고 사소한 일에 기뻐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출근길에 보게 되는 광화문이나 63빌딩, 서울역의 웅장한 모습보다는 가격에 비해 뛰어난 런치 스페셜이 그날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처럼.


저렴한 가격에 비해 미안할 만큼 쾌적한 호텔, 유독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관광안내소 직원, 뭔지 모르고 시켰는데 뜻밖에도 맛있게 먹은 저녁식사처럼, 사소하고 구체적인 사건이 주는 즐거움이 중요해진다.



4.

지도가 있으면 빨리 찾아갈 수 있지만 길을 잃으면 더 많이 볼 수 있다. 5분 거리를 30분에 걸쳐 가면서 더 많은 거리와 건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의미 없는 것이 상당수 섞여 있겠지만, 의미는 그들이 나에게 주는 게 아니다. 내가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5.

"모르는 게 더 나았을까? 세상에는 이런 곳도 있다는 것을?"
"글쎄. 사람 사는 곳이 거의 다 비슷하지 뭐. 여기서 살려면 아마 엄청나게 돈이 들 거야. 집세도 그렇고 생활비도 그렇고, 뭐든 아주 비쌀걸."
"맞아. 그리고 평화로운 것도 하루이틀이지, 계속해서 살면 심심할 걸. 100년이 지나도 옆집 사람 늙어 죽는 것 말고는 어떤 사건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아."
신포도가 맛없다고 주장하는 여우들처럼, 우리는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


그 동안 우리 인생에서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낀 날들이 며칠이나 있었을까. 사실 많았지만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것뿐일까. 숲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숲을 빠져나와야만 하는 것처럼, 행복했던 날들로부터 이렇게 멀어진 후에야, 너무 아득하게 지나와 후회조차 의미를 잃게 되는 시간이 되고서야 그때 그 순간이 얼마나 괜찮았는지 깨닫게 되는 것일까.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나를 스치자마자 과거로 변해 버리는 이 순간의 모든 것들을 충분히 맛보고 싶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핀란드의 포르보였다. 1346년 생겨난 포르보 강 기슭의 작은 마을. 이곳의 상징이기도 한 검은 지붕의 빨간 목조 건물들이 강가를 따라 늘어서 있다. 발길 닿는 대로 거닐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부르릉, 차에 시동을 걸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부랴부랴 그곳을 떠났다.


누가 보면 이 어여쁜 마을에 일말의 미련도 없는 사람들처럼.



6.

오래 기다리던 공연이다. 핀란드 여행의, 나아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한 밤이다. 덜컹거리는 밤기차 속에서, 폴란드의 경찰서 의자에 앉아서, 무뚝뚝한 거인들로 넘쳐나는 발트 3국을 따라 북상하면서, 행복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마다 이 시간을 상상했다.
그 시간이 진짜로 왔다.
바로 지금.
세상의 모든 행복한 순간이 그런 것처럼, 한밤의 오페라 공연은 꿈처럼 흘러가고 이윽고 끝이 났다.


(중략)


검푸른 호수. 하얀 별빛을 받으며 서 있는 영화 세트장 같은 고성.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 생생한 아리아의 선율. 상쾌한 여름밤은 아직도 반 이상 남아 있었다.
즐거워야 할 이 순간 그렇지 못하다면 이유는 한 가지다.


내 여행이 끝났다.

 



+

이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6년 전 내 생애 최고의 여행을 떠올리며 케케묵은 먼지 속에서 그 여행의 흔적들을 꺼내보았다.
2005년 9월부터 약 3주일 동안, 홋카이도에서 시작해 칸사이, 시코쿠까지 찍고 돌아왔던 여행.


그 중에서도 홋카이도에서 보낸 일주일은 다시는 못할 경험들 투성이었는데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앓아눕고 2학기 개강을 하고, 또 한국으로 돌아오느라고
그 여행에 대해 제대로 된 글로 홈페이지에 남긴 적이 없다.
엄청난 양의 사진을 찍었지만 정리할 엄두가 안 나 이 역시 전혀 업로드하지 못했다.


그 여행이 문득,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여행 기간 내내 유일하게 누군가에게 떠들어댄 기억,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12장에 걸친 편지를 찾았다.
친구에게 보내기 위한 편지였지만 또한 내 여행의 기록이기도 하기에
편지를 부치기 전에 편의점에서 복사를 해서 복사본을 갖고 있었던 덕이다.


책의 끄트머리에서 그 여행의 가장 고대했던 순간이 다가오자 저자는 말한다.
즐거워야 할 이 순간 그렇지 못하다면 이유는 한 가지, 내 여행이 끝났기 때문이라고.
그 기분이 어떤 건지 너무도 잘 알고 있고,
또한 그 정도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여행을 다시는 하지 못할 거란 걸 알기에, 나는 거의 잊어가던 오래된 여행의 기억을 굳이 끄집어 냈다.


그립다. 미치도록 불안하고 또 너무도 설렜던 홋카이도에서의 그 며칠이.
다시는 그런 여행 할 수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