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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본문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김훈 저 | 생각의나무 | 2002년 03월
1.
세상을 향하여 말할 때 나는 늘 자신의 어지러운 생명에 입각해 있었다. 그래서 내 말은 만신창이가 되어 허덕지덕하였다.
나는 내 말이 눈물이나 고름처럼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액즙이기를 바랐다. 그 분비물로 보편적 진실을 말하려는 허영심이 나에게는 없다. 나는 그 진물이 내 몸의 일부이기만을 바랐다.
세상은 읽혀지거나 설명되는 곳이 아니고, 다만 살아낼 수밖에 없을 터이다. 나는 미리 설정한 사유의 틀 속으로 세상을 편입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내 글의 계통 없음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흘린 액즙과 고름이 서로 섞이고 스미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것은 어찌 그리 어려운 일이었던지. 몸이 가장 부대끼는 날에, 가장 곤고한 글을 나는 썼다.
날아가는 솔개나 헤엄치는 물고기는 늘 나를 주눅 들게 한다. 말하지 않고, 몸으로 솟구치는 저 미물들의 삶은 얼마나 자족한 것인가. 아무래도 말은 몸보다 허술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말은 말을 말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끝없이 주절거린다. 나는 그 허술함의 운명을 연민한다.
2.
사람이란 뻔한 일을 대놓고 뻔하게 말해 주면 약올라하게 마련이다.
3.
물때와 물때 사이에서 선원들이 잠들 때 그들이 갑판 위에 얼기설기 늘어놓은 밧줄은 아름다웠다. 나는 그 밧줄의 아름다움을 해석적 언어로 전달할 능력이 없다. 아름다운 것들이 모두 다 전달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수국은 강렬한 원색의 꽃을 피우지 않는다. 수국의 꽃색은 조심스럽다. 그 꽃색은 자주색도 있고, 분홍색도 있지만, 수국의 색은 극한으로 치닫지 않고, 색의 초기 단계에서 더 이상 색이기를 멈춘다. 그래서 그 색은 색이 아니라 색의 추억같아 보인다. 수국의 화려함은 이 추억의 빛이다.
+
'색이 아니라 색의 추억같아 보인다' 란다.
대체 어떻게 이런 글을 쓰는 걸까.
하지만 김훈은 한없이 자신의 글의 '보잘것없음'을 역설한다.
나같은 사람은 김훈 글 보면서 이제 감탄이 아닌 탄식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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