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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내 젊은 날의 숲』 본문

THINKING/책, 글

김훈, 『내 젊은 날의 숲』

pencilk 2013. 5. 23. 03:49
내 젊은 날의 숲
국내도서
저자 : 김훈
출판 : 문학동네 201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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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얘, 그 인간이 모범수가 되었대.
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아버지가 구속된 후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 인간, 또는 그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인간' 또는 '사람'이라는 익명성에는 어머니가 살아온 삶의 피로감이 쌓여 있었고, 익명성을 다시 구체적 대상으로 특정하는 '그'라는 말에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ㅡp.9


2.
눈 덮인 숲 속의 나무들은 눈과 숲의 익명성 속에서도 개별자로서 외롭거나 억눌려 보이지 않았다. 나무의 개별성과 숲의 익명성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이나 구획이 없었다. 나무는 숲속에 살고, 드문드문 서 있는 그 삶의 외양으로서 숲을 이루지만, 나무는 숲의 익명성에 파묻히지 않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는 외롭지 않고, 다만 단독했다. 그것이 사람과 나무의 차이였고, 나는 그 차이를 처음 만나는 젊은 장교 옆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ㅡp.63



3.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메말랐다. 그의 목소리는 음성이 아니라 음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 목소리는 뭐랄까, 대상을 단지 사물로서 호명함으로써 대상을 밀쳐내는 힘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내 이름을 불러서, 내가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자리에다 나를 주저앉히는 듯했다. 그렇게 낯선 목소리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느낌들이 그를 처음 대면한 순간의 느낌이었는지 아니면 그후에 조금씩 쌓여서 굳어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마음이 켜를 이루고 결을 이루면 거기에 무늬들이 뒤엉켜서 가늘고 혹은 날카로운 느낌들 사이의 선후관계를 알 수 없게 되는 모양이다. ㅡp.79



4.
점심시간이었다. 신우는 안요한 실장의 연구동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돌아서서 걸어가는 신우의 뒤통수를 보면서 가마 그림을 마무리했다. 화폭 중앙에 둥근 가마가 자리잡고, 머리카락의 소용돌이가 한 바퀴 돌았다. 연필이 닿지 않은 부분의 종이에 빛이 배어서 머리카락을 부풀려주고, 가마가 맑은 날 초저녁에 뜨는 달처럼 드러나기를 바랐는데, 다 그려놓고 보니, 연필이 지나간 자리에 흑백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본다고 해서 다 그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본다와 보인다 사이가 그렇게 머니까 본다와 그린다 사이는 또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를, 그 아이의 뒤통수 가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이가 자라고 여자가 늙는 것은 닥쳐오는 시간 앞에서 쩔쩔매는 난감한 사태일 터인데, 그림을 그려서 그 난감한 것들을 종이 위에 붙잡아놓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 어린아이의 가마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는 말은 만진다는 말이나 품는다는 말과는 대척점에 있는 반대말이었지만, 그 두 개의 국면이 반대되는 대척점에서 서로 그리워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말일 수도 있다고, 그 어린아이의 멀어져가는 가마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ㅡp.187


5.
아이를 부채질해주는 안요한 실장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문득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 생각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갑자기 내 마음속으로 쳐들어왔다. 마음의 일은 난데없다. 마음의 일은 정처없어서, 마음 안에서는 이 마음이 저 마음을 찌른다. ㅡp.198



+
김훈의 수필은 좋지만 소설은 힘들다, 고 생각해왔다. 『내 젊은 날의 숲』은 처음 읽었을 때는 뭔가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힘든 글이었는데, 이번에 다시 시도했을 때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유는, 이 글이 소설의 형식을 빌린 수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소설이기를 기대하지 않고 그저 김훈의 글만을 기대하고 읽기 시작하니 술술 읽혔다. 김훈의 소설은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그의 무참한 시도이고, 또한 그 자체로 수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