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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아웃 본문
매년 꼬박꼬박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은 미뤄둔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차례대로 읽고 있다. 2009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은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수상작가의 자선 대표작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읽고 있는데 문득 TV에서 익숙한 단어가 들린다. '화이트 아웃'이라는 단어다. 그 단어가 익숙했던 이유는, 읽고 있던 글의 주인공이 산악대원이어서 불과 몇 분 전 책에서도 '화이트 아웃'이라는 단어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화이트 아웃 현상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모든 게 하얗게 보이고 원근감이 없어지는 상태.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세상인지,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상태.
길인지, 낭떠러지인지 모르는 상태.
우리는 가끔 이런 화이트 아웃 현상을 곳곳에서 만난다.
자신의 힘으로 피해갈 수 없는 그 순간,
현실인지 꿈인지 절대 알 수 없는,
화이트 아웃 현상이
그에게도 나에게도, 어느 한날 동시에 찾아왔다.
그렇게, 눈 앞이 하얘지는 화이트 아웃을 인생에서 경험하게 될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잠시 모든 하던 행동을 멈추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도, 이 울음을 멈추어야 한다.
근데 나는, 멈출 수가 없다.
채널을 돌리다가 4회 연속 방송을 한다는 자막을 보고서 일부러 채널을 맞춰 놓은, '그들이 사는 세상'의 준영의 내레이션이다. 드라마 속 준영은 부모님 문제와 지오와의 이별, 그리고 계속 꼬여만 가는 업무환경과 악천후, 교통사고까지 겹치면서, 그동안 참아왔던 것이 터지듯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한참을 운다. 그녀가 힘든 이유를 모르는 양언니는 옆에서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이유들 때문에 우는 거냐고, 쩔쩔매며 그녀를 달래려 한다. 그녀에게 그런 말들이 들릴 리 없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소리내어 엉엉 우는 횟수는 줄어들어간다. 태어날 때부터 울면서 태어나 어릴 때는 조그마한 일에도 참 쉽게도 엉엉 울어제꼈건만, 언젠가부터 누군가 보는 앞에서 운다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 되어버렸고 혼자 있을 때조차 우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찔끔거리다가 손으로 슥 닦아내는 정도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울 일이 줄어든다는 걸지도 모르겠다.
몇 달 전, 나에게도 화이트 아웃 현상이 찾아왔다. 말 그대로 백지 상태여서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하소연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회사를 뛰쳐나와 예약해뒀던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몇 시간을 버티다가 늦은 저녁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몇 시간을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마치 내일 세상 끝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허나 사람이란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가. 불과 몇 달 전 일인데도, 솔직히 이제는 그 시간들이 조금은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날의 화이트 아웃 이후로 몇 달의 기나긴 기다림 끝에 결국 나는 내 의지로 모든 것을 멈추었지만, 감정이나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히 흐릿해져가고, 멈춤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후회나 불안까지는 아니지만 문득문득 지금의 내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늘어간다.
책을 읽다 잠시 멈추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그들이 사는 세상'의 지오의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내가 지금 얘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눈도 아파 죽겠는데 나는 왜 얘랑 헤어져서 이렇게 내 무덤을 파는지.
엄마가 보시면 젊어서 힘이 남아돌아 그런다 하시겠지.
근데 어떡해, 나는 젊은데.
'그 겨울, 바람이 분다'보다 시청률은 안 나왔어도 훨씬 더 그녀다웠던 그사세 속 노희경 작가의 단 한줄의 문장.
근데 어떡해, 나는 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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