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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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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래왔다. 선택이 자유가 아니라 책임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항상, 뭔가를 골라야 하는 상황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라 진땀을 흘려대곤 했다.
때론 갈팡질팡하는 내 삶에 내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싶다. "백 미터 앞 급커브 구간입니다. 주의운행하세요." 인공위성으로 자동차 위치를 내려다보며 도로 사정을 일러주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이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 누군가 대신 정해서 딱딱 가르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커다란 걸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상사 뒷담화로 아침을 시작하고자 하는 직장 선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와 같은, 사소하고도 예민한 문제의 정답부터 제발 좀 알려주면 좋겠다.
2.
모든 고백은 이기적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고백을 할 때, 그에게 진심을 알리고 싶다는 갈망보다 제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는 욕심이 더 클지도 모른다.
3.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場)일뿐더러, 그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도감을 느낀다.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 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쇼핑도 연애도 인간을 고뇌하게 한다.
4.
나는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가 닿으려는 곳이 어디인지, 우리가 제발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
목이 잠겨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재인과 유희가 짧게 눈을 맞췄다. "잘 됐네. 어차피 오래가긴 어려운 관계였어"라고 유희가 말하자, "그럼, 그런 관계 오래가면 여자면 손해잖아. 그리고 그 핏덩이랑 뭘 어쩌겠니. 너도 이젠 현실적인 연애를 해야지"라며 재인이 거들고 나섰다. 아무튼 말들은 잘한다. 각자의 등에 저마다 무거운 소금 가마니 하나씩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걸어가는 주제에 말이다. 우리는 왜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판단하고 냉정하게 충고하면서, 자기 인생의 문제 앞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헤매기만 하는 걸까. 객관적 거리 조정이 불가능한 건 스스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차마 두렵기 때문인가.
6.
메신저를 종료하고 나서야 정작 유희의 현안에 대해서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가리와의 관계는 요즘 어떤지, 뮤지컬 수업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 등등을 나도 묻지 않았고 유희도 말하지 않았다. 점점, 내 손톱 밑의 가시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인간이 되어간다.
7.
"뭘 하더라도 상처는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겠니?"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한 그 말은 어쩌면 나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8.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아스팔트 위로 돌연 굵은 빗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진다. 거리를 걷던 행인들이 일제히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쳐 든다. 모두들 오늘의 일기 예보를 충실히 숙지한 채 길을 나섰나 보다. 거리는 곧 색색의 우산들로 물결을 이룬다. 나에게는 우산이 없다. 예측 불가능한 인생을 사는 것은, 오로지 나뿐인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유리로 된 자동문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다.
곤두박질치듯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무늬 없는 7cm 검정 하이힐이 주저하듯 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내려다본다.
빗속은 생각보다 아늑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팔을 앞뒤로 흔들며 걷는다. 버스 정류장에서 발을 멈춘다. 저녁의 정거장, 길들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지는 않을 것이다. 두 손을 공중으로 내밀어본다. 손바닥에 고인 투명한 빗물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맛이다.
+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야기.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너무 우울하거나 비참하지는 않고, 적당히 로맨틱한듯 하다가도 결코 그 로맨티시즘이 현실을 넘어서지 못하고 매정할 정도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소설이다.
은수가 하는 고민들도, 은수가 처하는 상황들도,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은수가 내리는 선택까지도 지극히 '평범'하다. 아니, '평범'하다기보다는 '보편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 때로는 왜 이런 결정을 내리지, 왜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거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은수를 소설 속 주인공으로 생각했을 때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정말 현실로 다가왔을 때의 이야기는 다르다.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아직은, 내가 은수가 했던 여러 선택들과 똑같은 선택들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은수처럼 서른 둘이 아닌 스물 여섯이기 때문에 아직은, 그럴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적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여성들 중에서 은수처럼 살고 있는 여자들이 그렇지 않은 여자들보다 훨씬 더 많을 거라는 것.
이런 게 보통의 삶, 보편적인 인생이라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직 스물 여섯인 나는, '현실은 이런 거지'라며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나도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 걸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래도 이렇게는……'이라고, 아직은, 고개를 젓는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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