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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aily Life

수능에 대한 상념들

pencilk 2003. 11. 4. 03:20

편의점에 뭘 사러 새벽 2시 넘어서 갔더니 그 편의점 알바생이 고스를 듣고 있었다. 고스를 들어본 적은 별로 없는데 하는 말들이 하도 가관이어서 집에 와서 마저 들었다.

뭐 주제는 수능이었다. 그러고보니 수능이 내일이네 어쩌네 하면서, 역시나 신해철답게 주제는 수능 안 보고도 잘 살 수 있다-로 가는 듯 하다가 이러면 안 된다고 낄낄대기도 하고, 수능 안 치고 도망쳤던 사람이 수능에 대한 격려말을 하고 서로 비웃기도 하고, 난장판이었다;

방송이 끝날 때쯤에는 여러가지 징크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뭐 미역국을 먹으면 미끄러진다든가, 엿을 붙이면 대학에 붙는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면서 신해철은 실수인 척 하면서 미끄러지네 어쩌네 하는 제목의 곡을 2개나 틀었다.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ㅠㅠ


이런 때면 당연하게도 내가 수능 쳤을 때가 생각난다. 참 이상한 것이, 대학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이맘때쯤에 마치 내가 또 수능을 보는 것처럼 긴장되고 걱정도 많이 됐었는데, 2학년 때부터는 아, 벌써 수능이야? 나 수능 때 어땠는지 가물가물하다-가 되었다. 오늘 수업 시간에 수능 날짜 듣고서야 그렇게 빨리 치냐고 할 정도로.

고 3 때는 잘 기억이 안 나고 재수 때 어머니께서 싸주신 밥은 기억난다. 아마 고 3 때는 그냥 평범한 도시락이었을 거다. 재수 때는 내가 김밥을 싸달라고 했었는데 어머니께서 김밥은 안 된다고 하셨다. 처음엔 귀찮아서 그러시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김밥은 칼로 자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였다.(웃음)
그래서 내가 "그럼 유부초밥은 되나?" 했더니 그건 된다며 결국 유부초밥을 싸주셨다. 그 땐 칼이 바닥에 떨어져도, "어머, 칼이 바닥에 붙었네"라고 말하며 웃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난에 나도 그냥 웃으며 넘어갔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재밌다.

그런 것들에 엄청나게 민감하게 굴 것까진 없지만 나름대로 추억을 만들어준다. 붙으라고 엿, 잘 찍으라고 포크, 잘 풀라고 휴지 등을 선물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미신을 맹신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수능 전날 밤. 지금 고 3들은 얼마나 떨릴까.
고 3 수능 전날 밤에는 내일이면 해방이라는 생각에 수능 잘 치라는 전화를 연거푸 받으며 꽤 들뜨고 설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재수 때는 밤에 누워서 잠이 안 와서 좀 뒤척이다가 약간, 아주 약간 울었다. 이유는 우습게도 수능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었다.
고 3과 수능 사이에 있었던 엄청난 일들과 잃었던 엄청난 사람들 사이에서, 문득 고 3 때 수능 잘 치라고 말해준 사람들 중에 재수 때도 수능 잘 치라고 말해준 사람은 몇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때 조금 눈물이 났다. 그 1년 사이에 많은 사람을 잃었는데, 그 대부분이 그렇게 자주 연락했던 온라인으로 알게 됐던 사람들이었고, 반면 정말 연락 자주 안했어도 학교에서, 또는 학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빠짐없이 연락이 왔었다.

그래서 나는 재수 수능이 끝나고 나서, 점수를 매긴 결과가 흡족하게 나왔을 때, 가장 먼저 어머니께 울면서 전화를 했고, 그 다음에는 웃으면서 슐에게, 그리고 23팸 언니들에게 연락했다. 그 전부터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수능 전날 밤에 확실히 깨달았달까. 수능만 끝나면 다시 나와 잘 지낼 거라고 생각했을 테고, 실제로도 수능이 끝나고 나니 갑자기 자주 연락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걸 수능 전날 밤에 나는 깨달아버렸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는 시험 결과를 알리지 않았다.


오늘 신해철이 말했다. 고 3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고. 그러니 수능 전날 밤에 모든 방송이 고 3을 위해 이루어질 거라는 기대는 해선 안 된다고. 피식 웃으면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 3들이 들으면 섭섭할 말이겠지만, 그건 고 3을 지나본 사람들만이 말할 수 있는 진실일 것이다.

글쎄, 내게 고 3은 대학에 대한 부담감보다도 더 사람에 대한 기억이 커서, 수능 전날 밤의 기억조차도 그렇게 '사람'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때를 웃으면서 말한다.


 

hill   03/11/26
저도 웃으면서 되새겨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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