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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 본문
기면발작증은 지독하게 외로운 병이다.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게 만드는 병인지도 모른다. 마이크는 그래서 무언가를 잃는 것에 익숙하다. 쓰러지듯 길 한복판에서 잠들어버리면 같이 있던 사람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던 물건들까지 모두 잃는 것이 다반사다.
스콧은 그런 마이크를 유일하게 잘 돌봐주는 친구인 듯 보이지만, 결국 두 사람은 삶의 길이 너무나 다르다. 한 순간의 객기로, 또는 무언가에 대한 반항으로 뛰어드는 것과 그것이 삶인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길거리에서의 삶, 남창으로서의 삶이 스콧에게는 그저 반항이나 재미, 일탈일 뿐이었지만 마이크에게는 그게 바로 빌어먹을 삶이었다.
언젠가 이 길에 와본 적이 있어. 나의 길이야.
어머니를 찾아 떠난 아이다호의 어느 길 한복판에서 마이크는 언젠가 이 길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영화의 시작과 같은 장면이다. 그러면서 그는 길이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웃어 보이며 '좋은 날 보내(have a nice day)'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야 관객들은 영화의 첫장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동그랗게 카메라 앵글이 좁아지면서 길은 마이크의 말대로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웃어보인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로는 2003 부산국제영화제 때 '엘리펀트'를 봤었다. '엘리펀트'에서도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한가로운 길의 풍경, 특히 하늘에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영화 종료 10분전에 등장인물을 다 죽여버리고 나서 마지막에 평화로운 음악과 함께 다시 한 번 나오던 흘러가는 구름 씬은 단연 압권이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는 이제 겨우 2번째 보는 거지만, 아이다호는 보는 내내 그의 영화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영화였다.
역시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장례식 장면이다. 몇 미터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벌어지는 스콧의 아버지의 엄숙한 장례식과 노래를 부르고 괴성을 지르며 이어지는 밥의 장례식. 마이크와 스콧은 장례식 내내 시선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삶 자체가 너무나 다른 것임을 깨닫는다. 나는 이 영화에서ㅡ특히 이 장면에서ㅡ 리버 피닉스라는 배우에게 정말 반해버렸다.
어설픈 호기심이나 동정심. 그런 것으로는 결코 마이크의 삶을 이해할 수도, 그의 삶에 뛰어들어 함께 할 수도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감히 이해하려고도 뛰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결국 동화될 수 없었던 기억만큼은 조금은 쓸쓸하게 남아있다.
어쩔 수 없이 삶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정해져있다. 그리고 결국 각자의 길을 살아간다. 스콧이 재벌 2세로 돌아갔듯이 마이크는 다시 아이다호의 길 한 복판에서 기면발작증으로 쓰러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의 주머니를 털고 운동화까지 훔쳐가버린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온 차에서 누군지 모를 사람이 내려 그를 태우고 떠난다. 마이크는 그 차가 데려다줄 어딘가에서 또 다시 그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차가 떠난 후, 화면 속에 덩그러니 남은 길이 우리에게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웃어보이며 말한다. "Have A Nice Day"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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