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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네프의 연인들 본문
내일 아침에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늘은 하얗다고 말해.
만약 그 사람이 나라면 나는 구름은 검다고 말할 거야.
그러면 우리 둘은 서로 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알렉스의 사랑은 불이다. 하지만 시력을 잃어가는 미셸에게 불은 바라보고 있기가 조금은 버거운 것이다.
알렉스는 미셸 몰래 그녀에게 온 편지를 읽고 줄리앙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끊임 없이 이해할 수 없다는 독백을 반복한다. 그는 미셸을 이해할 수 없다. 미셸은 알렉스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도 더 그를 모른다. 그들은 서로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
혁명 200주년 기념일의 불꽃놀이로 파리의 밤이 마치 낮처럼 환하던 날, 서로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술을 마시고 미친듯이 춤을 추면서, 그들은 사랑한다. 하늘이 하얗다고 말하면 구름은 검다고 말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돈을 훔치면서, 바다를 달리면서, 사랑한다. 공사로 통행이 막힌 퐁네프 다리 위에서 늘 수면제를 먹고 잠들던 알렉스에게 '나와 함께 자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던 미셸은 "이제 네가 약 없이도 잘 수 있어서 좋아. 이런 게 사랑인가봐"라고 말하며 미소짓지만, 알렉스는 미셸이 잠든 후면 다시 수면제를 먹는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게 사랑인가보다, 라고.
그냥 아름다웠다.
가끔 심장이 따끔거리기도 했고,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번 여름에 유럽에 갔을 때, 퐁네프는 영화를 찍을 당시인 89-91년 이후 또 다시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다. 통행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공사가 이루어진 반쯤은 더 하얗고 깨끗하고, 나머지 반은 낡고 허름했다. 그리고 영화 속 다리처럼, 그들이 잠을 자던 그 부분부분은 공사 파편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더욱 파리가 생각났다. 아침에 퐁네프 위에서 세느강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다 내 것처럼 느껴졌던 그 기분이 그리워졌다. 퐁네프 아래로 보이는 시떼섬이 떠올랐다. 그 때 이어폰으로 들었던 음악들이 떠올랐다.
마지막 장면이 좀 엉뚱하긴 했지만, ㅡ레오 까락스의 실패작이라 하는 이유도 후반부로 갈 수록 조금은 어이없는 이야기의 진행과 결말 때문이겠지만ㅡ 그 외의 영화의 모든 장면들, 특히 걸인들의 실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흑백의 첫 장면과 퐁네프 위에서의 화려한 불꽃놀이 장면, 그리고 줄리엣 비노쉬와 드니 라방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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