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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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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간관계라는 것은 늘 상대방이 더 적극적으로 챙기는 관계만이 남는다.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 내 쪽에서 좋아하고 존경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따금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도 내 쪽에서 먼저 전화하는 일은 없었다. 걔는 왜 코빼기도 안 보인다니? 좀 놀러 오라고 해라. 제삼자를 통해 그런 말을 전해 들어도 막상 전화하려 하면 주저하게 되었다. 지금 바쁘지 않을까. 내 전화를 반가워할까. 심지어는 나를 기억이나 할까. 그런 생각까지 들곤 했다. 이야기를 들은 후 면담자가 물었다.
"왜 그래요?"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고작 그 말을 했을 뿐인데도 벌써 목소리가 울먹해졌고 그러는 자신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그게 전적인 거절이 아니라 지금 바쁘니까 다음에 하자 하는 잠정적인 기점, 연기조차 받아들이기 힘들던 시기도 있었어요. 이십대 중반쯤에요.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전화를 좋아하지는 않아요. 특별한 용건 없이도 안부 전화들 많이 주고받잖아요. 저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망설여요. 상대가 반가워할까, 바쁜데 공연히 번거롭게 하는건 아닌가, 그래서 수화기를 들었다가 놓아버리는 때도 있어요."
...(중략)
"그런데 기가 막히는 건, 막상 사람들을 만나면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대한다는 거예요. 내면에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걸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요."
"그렇겠죠. 타인에 대한 배려가 많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친근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친근함을 두려워하는 거죠?"
"그런가 봐요. 아무것도 아닌 말에 너무 많이 상처받았어요. 다음에 만나자 해도 상처받고..."
"그게 콤플렉스예요. 아무것도 아닌 말에 상처받는 거."
...(중략)
"나도 남에게 부탁하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선생님도 그럼, 거절도 못하시나요?"
"그건 아니에요. 부탁하지 않는 것처럼 부탁도 거절하죠. 공정하게. 그런데 자기는 부탁도 못하고 부탁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나쁜 것만 가지고 있잖아요."
"맞아요. 저는 대체로 제 자동응답기에 녹음되어 있는 전화에만 응답하죠. 전번에 친구에게 여기 약도와 전화번호를 적어 주려고 보니 제가 선생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구요. 또, 사람들 만나면 서로 전화번호 주고받잖아요. 상대가 물으면 제 번호는 알려주는데 저는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더라구요. 요즈음에야 제가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정면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거죠."
"그래요. 그리고 그게 제 문제라는 것도 알아요."
"싹을 아예 잘라내는 거죠. 혹시 더 길게 자라는 놈이 있을까 항상 감시하고. 자기는 숲이 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 감수성과 자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늘 잘라내니. 물론 넓은 잔디밭 같은 것도 아름답기는 하죠."
면담자의 말은 한숨처럼 마무리되었고 나도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사랑 불능의 단초는 아무래도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부터 꺼내보아야 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아무에게도, 특히 이성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먼저 차 마시자고 전화해본 적도 없고......."
면담자는 내가 있는 쪽과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동작이 너무나 반사적으로 일어났고, 너무나 크다는 데 대해 오히려 내가 놀랐다. 그는 그 자세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오래도록 이른바 '연애'라는 것에 대해 눈으로 옆으로 뜨고 보며 폄하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 사랑 따위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고, 열정을 소모하고, 감정을 탕진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세상에는 연애보다 더 소중하고 고귀한 일이 얼마든지 있으며, 인간의 삶은 바로 '더 숭고한 일'을 위해 바쳐져야 한다고 믿었던 점. 융의 책을 읽다가 그런 내 마음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 같은 구절을 만날 때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스스로 대견하다고 여겼다. 융은 그것이 사랑에 대한 방어 심리가 극단적인 사람의 말투라고 했다.
+
폐부를 찌르는 듯한 심리묘사.
그 언젠가 심은희 선생님이, 그리고 소령 언니가 내 폐부를 찔렀던 것처럼, 그렇게 내가 아닌 타인이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내 모습을 지적했을 때의 서늘함. 아마도 그런 것을 세진은 느꼈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부터 ㅡ아니 정확하게 고 2 때 잠수함 일이 있은 후부터ㅡ 내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분석하고 결론내리는 과정을 반복해왔는데, 막상 그 원인에 대해서는 늘 간과해왔었다.
어린시절의 자잘했던 기억들이 모두 무의식 속에 상처로 남아 그 사람을 형성한다는 것. 이 책을 통해 새삼 그것을 깨달으면서 새삼스레 떠오른 어린 시절의 기억과 지금의 내 성격이 연결되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 정확한 원인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세진처럼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던 것, 생각보다 내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며 안도하고 넘어갔던 기억들, 그리고 이제는 잊혀졌다, 또는 묻어졌다 생각하는 기억들이 의외로 자잘하게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어 모두 내 성격에 영향을 미쳐, 이제는 나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다는 것 또한.
아직 1권밖에 못 읽어서 결론이 어떻게 날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는 나는 세진이 많이 불안하다. 자신에 대해 파헤치고 분석하고 자신의 상처를 들추고 또 들추어 나는 그것에 상처받았고 그래서 지금같은 성격을 가지게 되었네- 하는 식의 자신에 대한 분석은 물론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을 알 수 있고 여러가지로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상처받았음'에 너무 의지하려 들 경우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 내가 그랬듯이, '나는 상처가 있으니까'라는 가여운 핑계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아가는 오류를 범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도 모르는 것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무엇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더 나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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