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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불멸』 본문

THINKING/책, 글

밀란 쿤데라, 『불멸』

pencilk 2003. 11. 19. 03:46
불멸
국내도서
저자 :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 김병욱역
출판 : 민음사 201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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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세상에 개별자의 수에 비해 몸짓의 수가 비교도 안 될 만치 적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 즉 하나의 몸짓이 한 개별자보다 더욱 개별적이라는. 이를 격언삼아 얘기하자면 이렇다 : 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
나는 첫장에서 수영복 차림의 부인에 대해, 「시간에 속박당하지 않고 활짝 펼쳐져 나를 황홀케 한, 촌각의 공간 속에 던져진 그녀의 매력의 정수」를 얘기했었다. 그렇다, 그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잘못이었다. 결코 그 몸짓이 그 부인의 정수를 펼쳐 보였던 게 아니라, 차라리 그 부인이 한 몸짓의 매력을 드러내보인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몸짓은 한 개인의 소유물로 간주될 수도 없고, 그의 창조물로 간주될 수도 없으며(완전히 독창적인, 오직 자기에게만 속하는 고유의 몸짓을 창조할 수는 없으므로), 그의 도구로조차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오히려 그 역이 진실이다 : 즉 바로 몸짓들이 우리를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의 도구요, 꼭두각시 인형이요, 그들의 분신인 것이다.



2.

베르나르가 차 있는 데까지 그를 동행했을 때 폴이 아주 침울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그리즐리가 틀렸고, 이마골로그들이 옳아. 인간은 자기 이미지 외에 아무것도 아냐. 철학자들은 세상 여론 따윈 중요치 않으며,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인간이냐는 거라고 설명하겠지. 허나 철학자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인간들 속에 사는 한, 인간들이 우리를 보는 모습이 우리일 거라구.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늘 신경쓰고, 가능한 한 호감을 주려고 애를 쓰면 사람들은 협잡꾼이나 사기꾼으로 여기지. 그렇지만 나의 자아와 타인의 자아 사이에 눈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는 직접적인 접촉이 있을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 속에 비칠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불안한 탐색을 빼고서 사랑을 생각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타인이 우리를 보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구.


ㅡ 자네 말이 맞아, 맥없는 목소리로 베르나르가 말했다.


ㅡ 우리의 이미지란 단순히 하나의 겉모습이고, 그 뒤에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독립된 우리 자아의 진짜 실체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순진한 착각이야. 철저한 냉소주의로 이마골로그들은 그 역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어 : 즉 우리의 자아가 포착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혼동스런 하나의 단순한 외관에 지나지 않는 반면, 유일의 실제는 지나칠 만큼 포착하기도 쉽고 묘사하기도 쉬운 타인의 눈에 비친 바로 우리의 이미지라는 걸세.


그런데 더욱 끔찍한 사실은 자네가 자네 이미지의 주인이 아니라는 거지. 처음엔 자네 스스로 그 이미지를 그릴려고 애쓰지. 그러다 나중엔 최소한 그 이미지에 대해 영향력이나마 행사해 보려고, 어찌 통제라도 해보려 하나 헛수고야. 자네를 형편없이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데는 적의에 찬 쪽지 하나면 족하니까.」

 



+

밀란 쿤데라의 생각들은 언제나 참 매력적이지만, 이 <불멸>이라는 글에서는 그의 필력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보다도 더 파격적인 서술형식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주요 스토리도 명확하지 않고, 주인공은 대략 몇 명이 추스려지긴 하나 그 안에 괴테, 베티나, 헤밍웨이, 릴케. 랭보, 나폴레옹 등 수도 없이 많은 역사 속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현실의 인물인지 소설의 인물인지의 구분도 어려워지고 이야기는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를 마구 움직여댄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 속에 직접 등장하여 이야기에 개입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소설 속 인물인 폴이 쿤데라를 찾아와 술주정을 늘어놓기도 한다.(정말 놀라울 만큼 매력적이다!)


철학과 문학을 아우르는 그의 재치, 풍자 또한 놀랍다. 그는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센티멘털리스라고 새로 명명하는가 하면, 그걸로도 부족해 호모 센티멘털리스는 사실상 호모 히스테리쿠스와 동일한 것이라 말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패러디하여 인간의 성적 욕망과 관련한 시기를 스포츠적 벙어리 상태 기, 은유 기, 외설적 진실의 기, 아랍식 전화 기, 신비적 시기로 재규정하기도 한다. 보는 내내 감탄과 동시에 웃음이 터져나오게 한다.


앞에 인용한 몸짓과 자아의 관계에서 사람은 많되 몸짓은 적고, 그러므로 우리가 몸짓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짓이 우리를 이용하고 있다는 부분을 읽을 때는 정말 흥분될 정도였다. (그 뒤의 자아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에 관한 부분은 사회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그리 신선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물론 굉장히 공감하는 부분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정말 머리를 해부해부고 싶은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