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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희랍어 시간』 본문

THINKING/책, 글

한강, 『희랍어 시간』

pencilk 2011. 11. 27. 23:26
희랍어 시간
국내도서
저자 : 한강
출판 : 문학동네 201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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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당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희랍식 논증의 방식으로 이따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지 않았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

이제 당신은 아이를 안고 어두운 성당에서 걸어나옵니까.
입구의 경비원에게 맡겨놓았던 유모차를 찾아 아이를 태운 뒤 버클을 채웁니까. 함부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고쳐묶고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까. 열일곱 살의 내가 새벽부터 어리석음과 번민 속에 서성이던 그 거리를, 자잘한 검은 돌들이 박힌 포도를 통과해 걸어갑니까. 유모차 바퀴가 불쑥 튀어오를 때마다 아이의 가슴 앞으로 손을 내밀어 달랩니까. 선하기에 슬퍼하는 당신의 신을 어깨에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적 속에서 나아갑니까.

그곳은 이곳보가 일곱 시간 늦게 해가 뜨지요.
이제 멀지 않은 날에, 내가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필름조각들을 꺼내들 때 당신은 새벽 다섯시의 어둠 속에 있겠지요. 당신 손등의 정맥을 닮은 검푸른 빛은 아직 하늘에서 다 새어나오지 않았겠지요. 당신의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타오르며 글썽이던 두 눈은 눈꺼풀 아래에서 이따금 흔들리겠지요. 완전한 어둠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갈 때, 이 끈질긴 고통 없이 당신을 기억해도 괜찮겠습니까.


2.
그녀는 다시 교재를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깊게 숨을 들이쉰다. 숨소리가 분명하게 들린다. 말을 잃은 뒤, 때로 그녀는 자신이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말과 닮았다고 느낀다. 마치 목소리처럼 대담하게 침묵을 건드린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녀는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의식불명인 어머니가 한차례 더운 숨을 내쉴 때마다 침묵이 한 걸음 물러섰다. 어머니가 숨을 들이마시면, 몸서리쳐지게 차가운 침묵이 소리치며 어머니의 몸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녀는 연필을 쥔다. 좀 전까지 읽고 있었던 문장을 들여다본다. 이 철자들 하나하나에 작은 구멍 하나씩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연필심을 넣고 길게 찢으면 한 단어, 아니, 한 문장이 통째로 뚫려나갈 것이다. 거친 회색 재생종이, 그 위에 도드라진 검고 작은 철자들, 벌레처럼 등을 웅크리거나 활짝 편 악센트들을 그녀는 묵묵히 들여다본다. 발을 디디기 힘든 그늘진 장소. 더 이상 젊지 않은 플라톤이 고심하며 시간을 버는 문장. 손으로 입을 가린 사람의 불분명한 목소리.
그녀는 더 힘주어 연필을 쥔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쉰다. 그 문장에 밴 감정이 백묵 자국처럼, 무심히 굳은 핏자국처럼 드러나는 것을 견딘다.


3.
잠든 아이의 눈꺼풀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맞춘다. 나란히 누워 눈을 감는다. 눈을 뜨면 펄펄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아, 질끈 감은 눈꺼풀에 힘을 준다. 눈을 감았으므로 보이지 않는다. 반짝이는 육각형의 커다란 결정들도, 깃털 같은 눈송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짙은 보랏빛 바다도, 흰 봉우리 같은 빙하도 안 보인다.
밤이 끝날 때까지 그녀에게는 말도 없고 빛도 없다. 모든 것이 펄펄 내리는 눈에 덮여 있다. 얼다가 부서진 시간 같은 눈이 끝없이 그녀의 굳은 몸 위로 쌓인다. 곁에 누운 아이는 없다. 싸늘한 침대 가장자리에 꼼짝 않고 누워, 수차례 꿈을 일으켜 그녀는 아이의 따뜻한 눈꺼풀에 입맞춘다.


4.
눈을 뜨고 있는 꿈을 꾸다가 문득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상실감도, 체념도 느끼지 않는다. 잠이 천천히 몸에서 가시는 동안 단호히 꿈으로부터 돌아누울 뿐이다. 마침내 눈을 뜨고 희끄무레한 천장을, 윤곽이 무너진 사물들을 바라볼 뿐이다. 한번 더 빠져나갈 꿈 밖의 세계가 없다는 사실을 침착하게 확인할 뿐이다.


5.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살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

만익 네가 죽지 않았다면, 독일로 돌아가 널 다시 만날 때 난 네 얼굴을 만져야 했을까. 내 손으로 더듬어 네 이마를, 눈꺼풀을, 콧날을, 뺨과 턱의 주름들을 읽어야 했을까.
아니, 나는 그러지 못했을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너는 나를 욕망했으니까.
그 욕망을 견딜 수 없어서 몸부림쳤으니까.
우리 사이의 모든 걸 네 손으로 무너뜨렸으니까.
난 전속력으로, 너를 깊게 상처 입히며 도망쳤으니까.
널 원망했으니까.
네가 아닌 네가 보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네가 아닌 너만을 미치도록 그리워했으니까.




+
사실 한강의 책에서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그냥 책 전체가, 어느 문장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모든 문장이, 밑줄을 그어야 할 대상이니까.

소멸하는 삶 속에서 서로를 단 한순간 마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 글은 소설이라기보다는 한 장의 사진에 가깝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몇 권의 책 제목을 메모하고, 가방 깊숙한 곳에 쳐박아둔 채 잊혀졌던 카메라를 꺼내보기도 했으며, 줄곧 도쿄타워 OST를 들었다. 이 글을 쓰던 당시의 작가는 스스로의 언어가 통속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단다. 지금 곁에 있지 않은 아이의 존재를 떠올리고 상상하는 것을 '수차례 꿈을 일으킨다'고 표현하는 한강의 문장에서 통속적 언어를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없이 고민하고, 정제하고, 또 절제하며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 느껴지는 건 그녀가 좋은 작가이기 때문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