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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7번 국도 Revisited』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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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金起林은 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노래한 적이 있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나도 가끔씩 金起林을 흉내내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라고 혼자 노래 부를 때가 있다. 댕겨가는 그것들은 댕겨간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충분히 아쉽다. 사람은 태어나 끝없이 서로 참조하고 서로 연결되는 길 위를 댕겨가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햐쿠다케 혜성처럼 서로 닿을 듯 가까워졌다가 이제 영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기만 하고 있다. 댕겨가는 것들의 절망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제 영영 다시 만날 수 없다. 18,000년 뒤에 햐쿠다케는 다시 돌아오겠지만, 다시 찾아온 지구에 지난번 방문했을 때 살았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햐쿠다케의, 18,000년의 고독 앞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그리하여, 길들 위에서 내가 배운 것
1. 모든 건 한번 더 반복된다.
2. 우리에게 '한번 더'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3. 세계는 너무 거대해서 마주할 수 없다.
오직 알 수 없을 뿐. 그저 끝없이 서로 참조하고 서로 연결되는 길 위에 서 있을 뿐.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결국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오직 알 수 없을 뿐. 수많은 것들,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 읽었던 책들, 들었던 음악들, 먹었던 음식들, 지나갔던 길들은 모두 내 등 뒤에 있다. 무엇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 나는 유령의 존재가 된다.
2.
재현은 외로움과 심심함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악기점에 전시된 빨간색 전자기타에 매혹된 그는 반년 동안 용돈을 모아서 어느 토요일에 그 기타를 샀다. 기타가 생긴 뒤, 그는 그간 자신이 심심함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실은 외로움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자기가 외로운 줄도 모르고 걸핏하면 심심하다고 떠드는 소년. 그럴 때면 엄마는 짜증을 냈다. 지금까지 실컷 놀고 나서 그게 무슨 소리냐며. 심심하면 공부를 하라거나. 사람은 언제 심심해지고, 또 언제 외로워질까? 할 일이 없고 혼자 있을 때 사람은 심심해지며, 할 일이 많고 여럿이 함께 있어도 사람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기타가 생긴 뒤로 그는 외롭지 않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그건 제 방 벽에 위대한 기타리스트들의 사진을 붙이고, 그들의 음반을 반복해서 들으며 선율을 알아내고, 무대에 선 자신을 상상하며 연습, 또 연습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비틀스의 그 음반을 내게 판 뒤, 이제는 기타를 연습하는 것만으로는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리하여 이제 자신이 영원히 외로우리라는 걸 깨달았다.
"원래 인간은 다 외로워요."
내가 말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왼손의 마비는 풀리지 않더란 말입니다. 기타를 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어요.그 판을 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이제 자살하면 되겠네요."
"……."
"자살하세요. 어차피 난 그 판을 돌려줄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3.
술자리에서 재현은 쉴새없이 떠들었다. 그 시절에는 나도 꽤 떠들었다. 우린 앞다퉈 자기 이야기만 했다. 떠들어대지 않을 때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누구도 우리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또 우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게 우리가 아는 외로움의 정의였다. 그러므로 재현이 장광설을 늘어놓는 동안, 귀를 기울여 듣는 척하면서도 나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4.
재현이 둘로 늘어난 게 아니라, 맞은편에 세희가 앉아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성덕대왕 선종 정도는 부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던 여자.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러나 그 눈으로 두 사람이 이미 사귀기 시작한 상태라는 것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니 내 마음이 무척 어정쩡해졌다. 그런 마음을 감추려고 나는 시시껄렁한 농담들을 지껄였다.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그저 한번 웃고 지나갈 말들을 떠들어대노라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대부분의 일들과 감정들이 뭐 대개 그런 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위로가 됐으니까.
5.
나는 유령들이 아니야. 하지만 이미 죽어버렸지. 너희의 기억 속에서 말이지. 나는 여기 서서 오백사십여만 대의 자동차와 천오백만 명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지켜봤지. 하지만 여길 떠날 수는 없었어. 너희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나는 여기 남아 있으니까. 너희가 이제 여길 지나간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유령들의 모습으로 이 비행장에 남게 되겠지.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죽겠지만, 너희 기억 속의 나는 이 모습 그대로 여기에 남아 있겠지. 그러니 너희가 기억하기 전에 미리 죽었어야만 했던 거야. 그렇게 죽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7번국도의 유령들이 된 거지. 너희 삶의 배후를 서성이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일들을 하면서 말이야. 너희는 어디든 갈 수 있어. 하지만 나 7번국도의 유령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어. 희망을 찾아 나섰다고 했나? 그래서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가? 오백사십여만 개의 자동차와 천오백만 명의 사람들이 여기를 지나갔지만, 누구도 희망을 발견하진 못했지. 왜냐하면 나를 벗어나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이란 없기 때문이야. 내가 희망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줄까? 그건 바로 너희가 망각 속에 파묻어버린 기억들을 모두 되찾는 거야. 기억이 없는 곳에 희망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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