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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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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인생의 불행이 외로움을 타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불행은 불량한 십 대들처럼 언제나 여럿이 몰려다니죠.
2.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 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리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3.
우리 시대에는 고독이 외롭다.
4.
휴대폰이나 대형 마트나 DMB 따위를 없앤다면 뭐가 남을 것 같아?
책 같은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야. 원래 그 자리는 고독의 자리였어. 혼자 존재하는 자리.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고독은 흔했지만, 지금은 디지털 기기에 밀려 일상에서 고독이 사라지면서 고독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어. 21세기에 우리에게 허용된 고독의 공간이란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 루트, 혹은 코타키나발루 고급 리조트의 모래사장 같은 곳이자. 관광 산업이 정교하게 관리하는 이 고독을 경험하려면 몇 달 월급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고독의 가치는 점점 더 커질 거야.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고독이란 게 없어. 돈을 지불하지 않은 고독은 사회 부적응의 표시일 뿐이지. 심지어는 범죄의 징후이기도 하고. 예를 들어 선생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서 지내는 학생에게서 자살이나 힉교 폭력의 가능성을 읽고, 이웃들은 친구나 가족의 왕래가 없이 살아가는 1인 가구의 세대주가 잠재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만 하잖아. 우리 시대의 고독이란 부유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럭셔리한 여유가 된 거야. 고독의 재발견이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거지.
5.
그러고 보면 그 시절엔 분노가 외로웠지, 고독은 그다지 외롭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6.
그 말을 생각하면 우리라는 존재는 한없이 하찮아진다. 한 소녀가 최선을 다하기 위해 어둠 속을 달리던 그 새벽에 우리는 숙면에 빠져 있었으니까. 깨어난 뒤에야 우리는 거기에 붉은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불길은 우리를 태우지 못했고, 그 연기는 우리를 질식시키지 못했다. 거기 고통과 슬픔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고통과 슬픔이었다.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은 고통스럽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우리와 그 아이의 사이에는 심연이 있고, 고통과 슬픔은 온전하게 그 심연을 건너오지 못했다. 심연을 건너와 우리에게 닿는 건 불편함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불편한 감정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그럴 수밖에. 그때 우리는 고작 열여덟 살, 혹은 열아홉 살이었으니까. 우리는 저마다 최고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으니까.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그가 수집하고 싶었던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일어날 수도 있었던, 하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들려주는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오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진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고 빛바램과 손때와 상처와 잘못 그은 선 같은 것만 보여줄 뿐인 물건들.
+
역시 김연수. 최고다.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 만큼이나 정신없이 빠져서 읽었던 글. 한강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에 멈춰서서 심호흡을 하며 읽었다면, 김연수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문장 자체보다 글 전체가 이야기하는 바가 가슴을 짓눌러 와서 심호흡을 해야 했다.
김연수가 꾸준히 이야기해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단절, 또한 상호이해의 불가능성. 그리하여 끝내 각자일 수밖에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닿을 수 없는 어떤 영역을 그는 '심연'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절망하고, 또한 그 속에서 실낯같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여러가지 장치도, 단연 최고였다. 오랜만에, '이런 글은 나도 쓰겠다'가 아닌,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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