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cilk

한강, 『노랑무늬영원』 본문

THINKING/책, 글

한강, 『노랑무늬영원』

pencilk 2012. 11. 18. 21:27
노랑무늬영원
국내도서
저자 : 한강
출판 : 문학과지성사 2012.10.23
상세보기

1.
모든 상황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의 평화는 내 건강을 전제한 것이었다. 조건이 달라지면 상황도 달라진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만일 내가 그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의 다정함이 더럽혀지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나는 지겹도록 아팠고, 내가 지겨운 만큼 그도 지겨워했다. 나를 지겨워하는 그가 나도 지겨웠다. 서로의 얼굴이 지겨워서 종종, 암묵적으로 서로의 눈길을 피했다.
그 과정에는 어떤 부도덕도, 죄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며, 그도 그때의 그가 아닌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을 따름이었다. 외딴섬에 단둘이 표류된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질식시켰다. 그렇게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갔다. 서로에 대한 배려, 이타적 관계, 우정, 동료의식 들은 강 저편에 남았다. 애초에 완전한 타인이었다는 것ㅡ그 한 가지 명료한 사실만이 이편의 강가에 남았다.

2.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심성이 여리고 다정했었다. 그러나 닳아간다. 타이어가 닳는 것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조금씩, 닳아간다는 것을 의식 못하면서 조금씩, 바퀴가 미끄러워진다. 미끄러워지고, 미끄러워져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



+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집은 늘 의외의 실망감을 남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설집의 특성상 그동안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해온 단편들을 모아서 내게 되는데, 나는 그 작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소설집이 나오기 전에 이미 온갖 문학상 수상작품집 혹은 다른 형태를 통해 발표된 그의 단편들을 읽은 후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 한강의 소설집 역시 그런 면에서 거의 대부분 이미 내가 읽은 단편이거나, 혹은 발표한 적 있는 장편소설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단편이라거나, 혹은 오래전에 발표한 단편의 수정 버전 등이어서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희랍어 시간을 볼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이 대부분 오래전부터 써온 글들을 모은 것이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한강의 소설 속 여자들이 조금 지치기도 했다. 한때는 무척이나 공감하고 눈물나게 안타까웠던 인물들이지만, 이제 그만.. 이라는 느낌도.

아무튼 한강의 진짜 새 작품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