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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 『행복의 충격』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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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 『행복의 충격』

pencilk 2012. 11. 27. 23:26
행복의 충격
국내도서
저자 : 김화영
출판 : 문학동네 201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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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리하여 나는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여권을 소지하고 비행기에 실려 지구를 돌아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온 격이 되었다. 그러나 프로방스가 나의 고향처럼 느껴지기 위해서는 수년이 걸렸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거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거나, 말없이 씩 웃기만 해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친구들의 그 소우주가 부재한다는 이방인 특유의 상황만이 그 이유는 아니었다.

막연히 나의 육체, 나의 감각은 이 고장의 나무랄 데 없는 풍경과 기후에 저항을 느끼는 것이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나의 마음은 쉬 안정되지 않았다.

사철 밝은 햇빛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베란다 위에, 풀밭에, 거리에, 카페에 잘도 내리비치고, 소나무와 잡목림이 곳곳에 무성하며, 아름드리 가로수가 드넓은 포도 위에 그 너그러운 그늘을 드리우고, 아르크의 실개천이 엑스 시를 굽이돌며 그 빛 밝은 전원 풍경을 안고 흔들어 재우는 풍경이라고 묘사를 해놓고 보면 나의 불안한 마음은 더욱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요컨대 나는 갑자기 병풍그림이나 외국의 원색판 사진첩이나 화집 같은 곳에 그려진 행복한 풍경 속으로 나 자신도 모르게 들어오게 된 틈입자만 같아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수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나는, 그때의 얄궂은 저항감이나 불안정감은 아마도 내가 최초로 받은 '행복의 충격'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2.
해 질 녘이 되면 프로방스에서는 우주가 보인다. 둥근 세계가 보인다. 황혼 녘의 들판은 과일처럼, 잘 익은 빵처럼 둥글어진다. 낮에는 늘 '나'만을 생각하던 우리가 저녁 시간이면 나에게서 떠나 시선을 멀리 던지기 때문이다. 그때는 내가 세계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의 속으로 들어간다. 당신은 기억하는가. 또 하나의 프로방스인人, 가장 뜨거운 열정과 사랑과 삶의 충동에 불타던 작가 장 지오노를?

"하루해는 어둠의 혼란된 시각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하루해의 모양은 길지 않다. 화살이나, 길이나, 인간의 경주처럼 어떤 목적을 향해 가는 긴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태양이나 세계나 하느님의 모양처럼, 영원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가진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문명은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향하여, 어떤 머나먼 목적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설득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사는 것이며, 삶은 우리가 매일같이 항상 하고 있는 일이며, 하루의 매 시각 우리가 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목적을 다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모든 문명된 사람들은 새벽에, 혹은 그보다 좀더 늦게 혹은 그보다 훨씬 늦게, 요컨대 그들이 일을 시작하는 정해진 시각에, 하루가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하루가 그들이 '하루 종일'이라고 부르는 작업 시간에 걸쳐 있으며 그들이 눈꺼풀을 잠그는 시각에 끝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바로 그들이 날들은 길다고 말한다.

아니다, 날들은 둥글다.

우리는 그 어떤 목적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모든 것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언제든 느낄 태세를 갖추고 있는 오관과 살을 가지는 그 순간에 모든 목적은 달성되었다. 날들은 과일과 같다. 우리들의 역할은 그 과일들을 먹는 일이다. 우리들 본성에 따라 부드럽게든 탐욕스럽게든 그 과일들을 먹는 일이다. 그 과일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섭취하여 우리의 정신적인 살을, 우리의 영혼을 만드는 일, 즉 사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그 밖의 어떤 목적도 없다."


3.
그것이 아마도 내 청춘 마지막의 지중해 여행이 될 것만 같은 슬픔을 간직한 채 나는 그 방파제, 그 바다, 엘렌, 카트린, 주느비에브와 작별하였다. 포르멘테라의 그 외딴집에 나는 어느 겨울 꽃이 피는 날 다시 돌아가고 싶다. 따뜻한 겨울, 따뜻한 바닷가에 그때는 벌써 참으로 처녀같이 되었을 주느비에브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바다의 눈부신 보랏빛 꽃들은 여전히 거기 있으리라. 영원히 지중해의 봄을 남몰래 간직하면서. 그때 다시 가보고 싶다. 영원히 다시 가보고 싶다. 참으로 젊은 나의 땅을, 나의 바다를 영혼 속에 다시 껴안기 위하여.

 


+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파리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가야겠다고.
마일리지도 있으니 빠르면 몇 개월 후가 될 수도 있겠지.
일주일 열흘 허덕거리며 급하게 갔다오는 것이 아닌, 한 한달 정도 머무는 여행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