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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10/7 : 홀리 모터스, 마리 크뢰이어,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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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10/7 : 홀리 모터스, 마리 크뢰이어, 사랑에 빠진 것처럼

pencilk 2012. 10. 16. 21:30

7일 영화제 후기를 쓰려고 보니 6일 후기를 잘못 썼다. 마리 크뢰이어 7일에 봤는데 6일에 봤다고 썼구나. 헐.

나에게 기록은 소중하므로 6일에 쓴 마리 크뢰이어 후기를 7일 후기에 갖다붙이겠음.

영화제 관람 둘째 날이었던 7일은 11시부터 총 3편의 영화를 본 후 저녁 8시 반 기차로 서울에 올라와 다음날 월요일 바로 출근으로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그래도 이날 마지막에 본 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 준 유쾌함 때문에 피곤한 줄 몰랐던 하루.



홀리 모터스

월드 시네마 / 칸영화제 경쟁부문

감독 : 레오 카락스



제작국가 : France

제작연도 : 2012

러닝타임 : 116min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의 레오 카락스가 13년만에 내놓은 장편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티켓팅이 될 리가 없다며 거의 포기했던, 하지만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 의외로 천운이 따랐던 이번 티켓팅 덕에 레오 카락스의 최신작을 볼 수 있었다. 영화는 카락스 감독이 잠에서 깨어나 극장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이후 진행되는 영화 내용이나 등장하는 대사들에서 순간순간 이 영화가 현대인의 어떤 초상을 그리는가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혹은 중의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 탁월한 은유나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대사들에 여러번 감탄하기도 했고. 


주인공 오스카는 아침에 출근하여 9번 변신하며 9개의 인생을 산다. 보면서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가, 중반에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다가, 마지막에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드니 라방의 연기는 여전히 소름 끼칠 정도로 절절해,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혼이 나갈 것만 같았다.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여러가지 역할을 연기해야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싶다가도, 또 어느 순간 레오 카락스 감독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영화. 영화속 인물들은 하루종일 다른 누군가를 연기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삶인 것처럼 행동하는데, '저게 진짜 오스카의 모습인가' 싶으면 연기를 끝내고 벌떡 일어나 다음 역할을 위한 준비를 하는 드니 라방 때문에 몇번이고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기억에 남는 대사 하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사라졌었잖아." "사라진 적 없어. 난 끊임없이 일하고 있었지만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전 부인이 오스카에게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장면이었는데, 나에게는 감독 스스로 자신의 영화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로 들렸다. 그 외에도 카메라 크기가 너무 작아져서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 없다며 예전에 비하면 너무 작아져버린 카메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던 대사들도 기억에 남고.


그나저나 드니 라방. 사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을 생각하며 영화를 보다가 처음에는 드니 라방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드니 라방을 드니 라방이라 알아보지 못하고 저 남자는 누군가, 드니 라방은 언제 나오나, 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드랬지. 하긴 그 영화들이 대체 몇 년 전 영환데. 하지만 드니 라방이 나이가 들었고 그의 외모가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좀 충격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히려 레오 카락스가 생각보다 엄청 젊어 보여서 깜놀, 찾아보니 두 사람 나이 차이가 한 살밖에 안 나는구나.. 레오 카락스가 한 10살은 많을 줄 알았어... 


그래도 그렇지 네이버.. 드니 라방 프로필 사진 이런 식으로 하기냐.



이건 영화 속 한 장면 같은데 드니 라방이 저, 저, 저 정도는 아니라고. (...아니겠지?)


그에 반해 레오 카락스는




슬프니까 드니 라방의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 사진으로 <홀리 모터스> 후기는 마무리하는 걸로.





마리 크뢰이어 Marie Kroyer

월드 시네마

감독 : 빌 어거스트



제작국가 : Denmark

제작연도 : 2012

러닝타임 : 98min


유명한 화가 남편, 사랑스러운 딸, 유럽 최고의 미녀로 칭송받는 아름다운 미모. 이처럼 마리 크뢰이어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자로서도, 아내로서도, 그리고 예술가로서도 행복하지 못하다. 뭐랄까,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꿈ㅡ혹은 허세ㅡ을 가진 여자가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유명 화가를 남편으로 맞아 자신도 언젠가 화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꿈ㅡ혹은 허세ㅡ을 이어가면서, 끊임없이 남편과 자신의 실력을 비교하며 자신은 남편만큼 그림에 재능도 없고 결코 화가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한 그런 그의 아내가 되었기에 자신의 부족한 실력이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수ㅡ혹은 무마될 수ㅡ 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림 실력은 최고지만 과대망상증과 정신분열증을 앓으며 남자로서도, 가장으로서도, 혹은 인간으로서도 점점 참기 힘들게 변해가는 남편을 마치 현모양처 컴플렉스라도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감싸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자. 하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히자 새로운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사랑에 뛰어든 여자. 세상 물정 너무 몰랐던 여자. 그리하여 법적으로도, 또 정서적으로도 하나뿐인 딸마저 잃고 마는 여자. 아름답고 지적이며 아무 잘못도 없는 한 여자의 인생이 제 뜻과는 달리 너무도 쉽게 망가질 수 있었던 시대의 이야기.


2012년에 제작된 영화치고는 음... 옛날 옛적 중세 유럽의 한 아름다운 녀성의 비극적 인생 대서사시로군, 흠... 싶은 영화였다. 뭐 그런 내용이라는 걸 알고 봤기에 큰 불만은 없었고, 마리 크뢰이어 역의 비르기트 요르트 소렌슨이 참으로 매력적이더라. 그 묘하게 강렬한 눈빛은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미녀들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


영화 끝나고 엔딩 크레딧 올라가는데 뒤에 앉아 있던 어린 남자애들(대학생 정도)의 대화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아마도 남자애 A가 이렇게 말했더랬지. "피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영화로군." 그나마 다행인 건 옆에 있던 남자애 B가 그 말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어이없어 했다는 것 정도랄까. 이 영화 본 감상이 겨우 그딴 한줄평일 거면 집에 가서 만화책이나 봐, 쉐키야.




사랑에 빠진 것처럼

아시아영화의 창 / 칸영화제 경쟁부문

감독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제작국가 : Japan/France

제작연도 : 2012

러닝타임 : 109min


학비를 벌기 위해 에스코트 일을 하는 아키코(라고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에 설명이 적혀 있는데 에스코트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아무튼 언제든 전화 주세용~ 이러면서 사진 찍어서 여기저기 광고 전단지를 뿌린 것으로 보아 대충 콜걸? 그런 종류의 일일 거다)와 은퇴한 노교수 타카시의 만남. 타카시가 아키코에게 바라는 것은 육체적인 관계가 아닌 인간적인 관계이고, 그래서 그들은 긴 대화를 나눈다. 피곤하니 빨리 자자는 아키코와 좀 더 이야기하자면서도 어쩔 줄 몰라하는 타카시 할아버지의 모습은 관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오게 만들기 충분했다.


영화를 보기 전 콜걸과 은퇴한 노교수의 만남이라는 설정에서 상상했던 영화의 분위기가 있었는데 ㅡ배경이 일본이고 감독이 이란 태생이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어둡고 침침한 오오라ㅡ 의외로 영화는 굉장히 소소하고 따뜻하며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는 유쾌한 분위기였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단순한 스토리를 섬세한 상황 설정과 대사로 구성한 감독의 연출력, 그리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까지 ㅡ특히 타카시 역의 오쿠노 타다시의 연기가 최고ㅡ 영화를 보는 내내 유쾌했고 마지막에 한껏 긴장되었다가 엔딩 크레딧과 함께 그것이 빵 하고 터졌을 때의 희열은 잊을 수가 없다. 그걸 희열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극장이 떠나갈 정도로 폭발적인 관객들의 반응이 터져나왔었지. 크레딧 올라가는 동안에도 내내. 집에서 혼자 봤다면 절대 느낄 수 없었을 공감의 분위기. 잊을 수 없는 엔딩이었다.


이 영화 정도면 일반 극장에서 상영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홀리 모터스는 안 될 거야.. 5분짜리 영화 20편을 모아놓은 10+10도 안 되겠지. 알 수 없는 은유와 시가 난무하는 코뿔소의 계절도.. 하지만 이 영화는!) 너무 우울하거나 잔인하지도 않고 나름 유쾌하고. 라고 쓰고 보니, 그래도 일반 극장에서 상영하는 다른 상업 영화들과 비교하니 심하게 정적이구나 이 영화. 역시 개봉은 무리이려나. 이런 영화를 더 많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