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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선셋 파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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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렌조는 일어나지 않은 일, 살아 보지 않은 삶, 벌어지지 않은 전쟁, 진짜 세계로 여기는 세계와 평행을 이루는 그림자 세계들, 말해지지 않은 것과 하지 않은 것들, 기억되지 않은 것에 관한 에세이를 써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확실한 영역일 테지만 탐색해 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2.
차가 브루클린 다리를 건널 때 그는 이스트 강 건너편의 거대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사라져 가는 건물들과 사라지는 손에 대해 생각했다.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
처음 폴 오스터를 알았을 때 그의 글에 끌렸던 이유는 시쳇말로 'B급 정서' 때문이었다. 달의 궁전, 뉴욕 3부작도 그랬지만 결정적이었던 건 아무래도 '빵 굽는 타자기'였을 거다. 가장 많은 것을 가지고 가장 적은 일을 한 사람, 세속적 성공을 보장해 주는 온갖 이점과 재능과 가능성을 가지고 시작했으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을 선발하는 '크리스토퍼 스마트 상'을 창설했다는 부분에서 그야말로 빵 터졌고,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폴 오스터의 노예가 되었다. (폴 오스터 외에도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기호의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 도모토 쯔요시의 정신세계 등이 비슷한 이유로 나의 애정을 받았다.) 어쩌면 내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 정서를 이해하고 같이 빵 터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내 안에서 분리되어 있다.
이번에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빵 굽는 타자기'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오래 전에 내가 빵 터졌던 '크리스토퍼 스마트 상'에 관한 부분 중에서, 이번에는 그 상을 창설한 이유에 대해 폴 오스터가 덧붙인 뒷 문장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문학적 치기였지만, 그 배후에는 불안과 혼란이 숨어 있었다. 나는 왜 실패를 정당화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까? 빈정조의 거만한 말투와 지적 과시의 태도는 무엇 때문인가?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ㅡ내가 스스로 선택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ㅡ의 표출이었고, 그런 상을 제정한 진짜 속셈은 나 자신을 승자로 선언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뚤어진 응모 규정은 인생이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타격을 피하고, 돈을 분산 투자하여 위험을 줄이려는 방책이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이기는 게 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다 해도 나는 정신적 승리를 주장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작은 위안이 되겠지만, 나는 벌써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두려움을 드러내는 대신, 재치있는 농담과 빈정조의 어투 속에 그 두려움을 파묻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다만 내 앞에 놓여 있는 힘든 싸움에 대비하여 나를 단련하면서, 예상되는 패배에 익숙해지려고 애쓰고 있었다."
처음 폴 오스터를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아도 무언가는 반드시 달라져 있을 것이다. 20대 초반의 여대생과 30대 중반을 향해 가는 백수의 갭은 대다나다. 그래서 그때는 그저 치기 어린 '크리스토퍼 스마트 상' 창설 자체에 대해 낄낄거렸지만, 이제는 그 뒤에 담담하게 털어놓은 폴 오스터의 솔직한 고백이 더 눈에 들어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어서야 나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아직도 내 안에 많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고, 요즘 들어 자주 떠올리곤 했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진실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변하되, 그 변해온 과정에서 파생된 수많은 스스로가 어느 하나 사라지지 않고 그 사람의 안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리하여 지금 이 시간의 경계선에서, 내 안에는 또 하나의 내가 자리하게 되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흐른 후 지금 이 시간들을 뒤돌아보았을 때, 그때서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선셋 파크'의 저 마지막 문장은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아야 할 때가 내게는 바로 지금인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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