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cilk

폴 오스터, 『빵 굽는 타자기』 본문

THINKING/책, 글

폴 오스터, 『빵 굽는 타자기』

pencilk 2013. 3. 22. 04:34
빵 굽는 타자기
국내도서
저자 : 폴 오스터(Paul Auster) / 김석희역
출판 : 열린책들 2002.01.31
상세보기

 

1.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없지만, 나는 주제넘게도 <제1회 크리스토퍼 스마트 상>을 창설했다. 그때 나는 4학년이었는데, 응모 규정은 가을호 마지막 페이지에 실렸다. 다음은 본문에서 무작위로 골라낸 문장이다. <이 상의 목적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반대파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모든 세속적인 야심을 거부하고 부자들의 잔칫상에 등을 돌린 재능있는 사람들…… 우리는 크리스토퍼 스마트를 본보기로 택했다…… 그는 압운대구법의 창시자로서, 손쉬운 영광의 길을 박차고, 알코올 중독과 광기, 종교적 광신과 예언적 글쓰기를 선택한 18세기 영국인이다…… 그는 무절제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길을 발견했고, 영국의 전통적 시인들에게 보여준 초기의 가능성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위대성을 실현했다. 지난 2세기 동안 온갖 중상모략을 받으면서 그의 평판은 진흙탕으로 더럽혀졌다…… 크리스토퍼 스마트는 이름없는 자들의 영역으로 추방되었다. 영웅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그의 이름을 되살리고자 한다.>

이 상의 목적은 실패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었다. 일상적인 좌절이나 실수가 아니라, 엄청난 타락과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가 그 대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가장 많은 것을 가지고 가장 적은 일을 한 사람, 세속적 성공을 보장해 주는 온갖 이점과 재능과 가능성을 가지고 시작했으면서도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을 선발하고 싶었다. 여기에 응모할 사람은 자신이나 친지의 실패담을 50단어 정도의 에세이로 써서 제출해야 했다. 당선자에게 주는 상품은 크리스토퍼 스마트의 두 권짜리 <전집>이었다. 나를 빼고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지만, 응모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문학적 치기였지만, 그 배후에는 불안과 혼란이 숨어 있었다. 나는 왜 실패를 정당화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까? 빈정조의 거만한 말투와 지적 과시의 태도는 무엇 때문인가?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ㅡ내가 스스로 선택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ㅡ의 표출이었고, 그런 상을 제정한 진짜 속셈은 나 자신을 승자로 선언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뚤어진 응모 규정은 인생이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타격을 피하고, 돈을 분산 투자하여 위험을 줄이려는 방책이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이기는 게 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다 해도 나는 정신적 승리를 주장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작은 위안이 되겠지만, 나는 벌써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두려움을 드러내는 대신, 재치있는 농담과 빈정조의 어투 속에 그 두려움을 파묻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다만 내 앞에 놓여 있는 힘든 싸움에 대비하여 나를 단련하면서, 예상되는 패배에 익숙해지려고 애쓰고 있었다.

 

2.
프랑스는 논리상 필연적인 선택이었지만, 논리적인 이유 때문에 그곳에 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프랑스 어를 할 줄 안다는 것, 프랑스 시를 번역하고 있었다는 것, 프랑스에 사는 사람을 많이 알고 있고 또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 ㅡ 이런 점들이 내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프랑스에 가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킨 것은 3년 전 파리에서 있었던 일의 기억인 듯하다. 나는 그 기억을 아직도 마음에서 몰아내지 못했고, 그 체류가 갑자기 중단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곧 돌아오게 되리라 믿고 파리를 떠났기 때문에,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을 때와 같은 미진한 느낌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쭈그리고 앉아서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때의 자기성찰과 자유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쭈그리고 앉아서 글을 쓰기에는 가장 좋은 상태가 될 것 같았다. 국적을 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국을 등지는 것은 내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고, 다시는 미국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해보지 않았다. 다만 한숨 돌릴 여유, 내가 정말로 나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인간인지를 결정적으로 알아낼 기회를 갖고 싶었을 뿐이다.

 

3.
하디 : 그냥 다음으로 넘어가면 안 될까?
로렐 : 안 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하디 : 하지만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절대로 끝내지 못 할 거야.
로렐 : 첫 부분도 못해 쩔쩔대면서 왜 끝내는 걸 걱정해? 아예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도중에 실패하는 게 낫다는 규정이라도 있어?
하디 : 우리는 실패하지 않았어. 다만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는 실패하도록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 우리는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하고 있는지도 몰라. (사이) 이건 단지 테스트일 뿐이야.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