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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Eliot의 몰개성 이론 본문
T.S. Eliot의 몰개성 이론
- 작품 속에 드러나는 작가에 대하여 -
엘리엇은『에고이스트』(The Egoist)지(紙)에 두 번에 걸쳐 발표되었고, 후에『성스러운 숲』과『비평선집』에 재수록되었던 비평문「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전통론과 몰개성 시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엘리엇은 이 글에서 시인은 다만 자기 몰각에 의해서만 과거의 의식을 발전시키거나 획득해야하고, 현재 존재하는 그대로의 자신을 자기보다 더욱 가치 있는 그 무엇에 계속적인 굴복을 해야 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술가에 있어서 진보란 더욱 가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희생이자 개성의 끊임없는 몰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엘리엇의 몰개성 시론은 그의 비평문「전통과 개인의 재능」에 나타나 있는 바, 시는 정서의 표현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이다. 또한 엘리엇은 1928년 비평집『성스러운 숲』의 재간(再刊)에 붙인 서문에서 시는 그 자체의 생명을 지니며, 그 부분 부분은 시인의 정연한 전기적 자료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 무엇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인이 가진 것은 표현할 개성이 아니라 특정한 매체이며, 그 매체에서 갖가지 인상과 경험들이 특수하고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결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근본적으로 시 창조과정을 경험하는 시인 자신과 시를 만드는 정신은 완전히 구별될 수 있는 별개의 것으로 보고, 정서(emotion)와 감정(feeling)이라는 시인의 경험이 창조자의 개별성을 극복한 예술적 정서(art emotion)로 바뀌어져, 전혀 새로운 복합체로 탄생하는 과정으로 생각하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원숙한 시인의 정신과 미숙한 시인의 정신 사이의 차이점은 어떤 개성의 가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흥미 있는 점이 많거나 적다는 점에 있지도 않으며, 내용의 풍부함의 여부도 아니다. 시인의 정신은 특수하고 다양한 정서를 마음껏 자유로이 구사하여 새로운 결합을 이루게 하는 세련되고 원숙한 매개체가 되는데 있다. 그래서 시의 창작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이들을 몰개성화 시키는 것이다.
(중략)
결국, 엘리엇의 몰개성 시론은 개성(자아)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더 깊은 자아 속인 "의식의 밑바닥(below the level of consciousness)"으로 도피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융(Carl Gustav Jung)은 그러한 의식의 밑바닥을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이라고 부르면서, "예술 작품의 본질이란 그것이 갖고 있는 개인적인 특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훨씬 초월하여 인류 전체의 정신과 영혼을 대변하여 말하는 것이 예술 본래의 면목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엘리엇이 말하는 바, 시인은 시 속에 자신의 개인적인 정서가 아닌 보편적인 정서를 드러내야한다는 '몰개성 시론'과 어느 의미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황무지』에서 그가 신화를 이용하는 것을 이런 관점에서 이해가 된다.
+
T.S. Eliot의 몰개성 이론이 맞는지 틀린지는 알 수도 없고 정답도 없다. 그저 Eliot은 그렇게 주장했다더라- 정도의 의미일 뿐. 그렇게 결론이 나지 않는 것들이 세상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술 작품 속에 그것을 만들어낸 작가가 얼마나 개입되느냐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끊임없이 있어왔고, 특히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거쳐 '예술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 따위의 거듭되어온 정의내림 속에서는 지겹도록 다루어진 주제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작품 속에 작가가 조금도 개입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논쟁이 되어온 것은, 그렇다면 이렇게 작가가 작품 속에 드러나는 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따위의 문제이다. 앞서 말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을 내기 위한 과정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생각은 prohibit에서 짧게 언급한 적이 있다.
"조금씩 비어간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어차피 글로 드러나는 것들이 모두 나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나조차도 낯선 내가 들어가 있는 글은 나에게 두려움까지 느끼게 했다. 내가 의도한 대로 글을 써내려 가는 것이 아닌, 무의식 속의 내가 글에 툭툭 튀어나올 때마다. 나중에 문득 돌아봤을 때 글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나는 사라져버린 후인 것은 아닐까하는 망상."
"글을 통해 누군가를 읽는다는 것의 모순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의 글을 읽고 내가 어떤 인간일 거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결코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글 속에서 캐치해 낸 나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조차도 몰랐던 나의 한 단면일 수도 있고, 또는 전혀 내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 역시, 글 속에서 느꼈던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괴리에 혼란스러워지는 것보다는, 그냥 글만 보고 자기들 임의대로 나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글은 그냥 글 그대로 느끼면 되는 거 아닐까. 굳이 글 앞에 나에 대한 소개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물론 작가를 이해함으로써 더 이해하기 쉬워지는 글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내가 쓰는 글들은 나를 전혀 몰라도 공감하는 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글은 글이고 나는 나다. 글을 쓴 사람이 나라는 사실만은 절대 변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글=나’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내 글에 굳이 모든 사람이 공감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공감할 수 있는 사람만 공감하면 되는 것 아닌가."
솔직히 Eliot이 주장하는 그 심오한 '예술이란 작가의 개성을 몰개성화 시켜서 인류의 보편적 무언가를 드러내야 한다'는 둥의 의미는 알지도 못하거니와 별로 고민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그로 인해 꼬리를 물고 파생된 것에 대해 끄적일 뿐이다. 글 속에는 그 글을 쓰는 이가 분명 드러나되,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일 수 없다는 것. 그 사람이 평소에 생각한 것이 드러나기도 하고, 글을 쓰면서 그 사람도 처음 한 생각들도 있었을 것이고, 늘 그렇게 생각해왔으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새삼 깨닫기도 하면서, 그렇게 쓰는 것이 글이다. 물론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쓰는 것 역시도 글이다. 글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하나의 일탈이랄까.
그냥,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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