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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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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 때의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몸 안에 있는 하나의 공기 덩어리로서 느꼈던 것이다. 당구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된 네 개의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미세한 티끌처럼 폐 속으로 들이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그 손아귀에 넣는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잡는 그 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하고.
그것은 나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인 명제로 생각되었다. 삶은 이 쪽에 있으며, 죽음은 저 쪽에 있다. 나는 이 쪽에 있고, 저 쪽에는 없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죽음을(그리고 삶을) 파악할 수는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적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저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나 밤에 기즈키를 사로잡은 죽음은, 그 때 동시에 나를 사로잡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공기 덩어리를 몸 속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심각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숨막히는 배반성(背反性) 속에서 끝없는 제자리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확실히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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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때문에 쳐박혀 있던 먼지 쌓인 <상실의 시대>를 꺼내 참오랜만에 다시 읽는 중이다. 책 앞에는 내 싸인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99. 6. 5. No. 425 현경이가 이 책을 사다. - 무더운 여름이 성큼 다가와버린 듯한 밤에...-" 보고 굉장히 낯설고 또 우스웠다. 확실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또 지금보다는 훨씬 순수했던 고 3 시절 답다. 나도 한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허무주의에 빠져 멋도 모르고 허우적댄 적도 있었다.
무려 4년 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읽고 있는 하루키의 글은 참 쉽게 술술 넘어간다는 느낌이다. 물 흐르듯 감정을 맡기고 읽기에는 좋다. 그리고 그 때도 다이어리에 써가며 공감했던 삶의 대극이 아님으로써의 죽음에 대한 구절은 지금 다시 읽어도 여전히 와닿는다. 레포트를 쓰는 내내, 종종 메모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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