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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본문
봄이 되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나에게 떠오르는 봄의 이미지는 대학교 1학년 때,
확실한 연애는 아니었지만 그 비슷했던 경험,
늘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은 설레임 속에서 걸어다니던 꽃이 아름답게 핀 교정,
그리고 <거짓말>이다.
# 1.
성우 서준희.
준희 네.
성우 세상에, 사랑이 있니?
준희 (보면)
성우 앞 봐, 앞 봐야 차 몰지.
준희 (차 몬다)
성우 있..니?
준희 몰라요.
성우 (앞만 보며, 입가에 서글픈 미소 띤) 왜 몰라. 넌 부인 사랑 안했어?
준희 (작게 미소띤) 좋아해요.
성우 (고개 돌려보며) 너 니 부인한테도 그렇게 대답해주니?
준희 (편한 웃음) 네. 난 걜 보면, 즐거워요. 걘 그 말을 좋아하구요.
성우 (여전히 앞만 보며, 작게 웃음) 별나다. 그럼 넌 사랑한 사람 없어?
준희 있어요.
성우 누군데.
준희 오드리 햅번요.
성우 (보면)오드리 햅번? (웃으며) 뉴욕에서 그 여자 옆집에 살았니?
준희 (웃는다) .......
성우 나두 리차드 기어를 사랑하지만, 남들한텐 그런 식으로 말 안해.
돈 애 같 잖니.
준희 정말이예요.
성우 (창밖만 본다) ....
준희 (입가에 선한 웃음 번진채) 나한테 사랑은, 가슴에 피멍 들도록 아프고,
그 사람 때문에 잠 못 들고, 자면서도 보고 싶은 건데,
난 정말 그 여자 때문에, 그래 봤어요. 장난 아니예요.
성우 (준희 얘기 안 듣고 있었다, 창가보며, 딴 생각하며) 사랑이 그런거니....
설레고, 아프고, 잠 못들고, 그리고 또 뭐라구...?
너, 많이 아는구나.
그럼, 사랑이-, 챙피할 수도 있니?
난 사랑이 챙피한데. 내가 한 사랑이 다 챙피한데...
준희 (보면)
성우 (서글픈, 혼잣말) 사랑이-, 있어?
# 2.
성우 N.
난 봄이 싫어, 마음이 너무 설레.. 너무 이뻐...
사람들은 바보야. 이렇게 이쁜 계절에 결혼을 하고...
그럼 자기 여자나 남자를 보느라 계절을 못 보잖아...
바보들... 봄인데 봄을 보지....
내 나이 서른 셋.
술을 한 잔 마시고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은 상태입니다.(과장되게 웃지만 곧 그 웃음이 점점 흐려지며) 너 남자 아니지? 유부남은 남자가 아니야... 어린애는 남자가 아니지. 고로 난 남자가 아닌 인간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서준희, 내 생각인데...내..생각인데....
...사랑은....없어.....
+
난 봄이 싫어, 마음이 너무 설레...
성우의 그 말이 그 때는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설렌다는 느낌이 왜 싫은지 몰랐을 때니까.
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때를,
당시에는 행복한 줄 모르고 그냥 스쳐지나갔던 그 시간들을
자꾸만 떠오르게 해서, 그러면서도 아직도 자꾸만
마음을 설레게 만들어서... 그래서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 3.
영희 아까 그 남자 누구니? 너 태워다 준 사람?
성우 그냥, 회사 친구예요. 신경 안써두 돼요. 유부남이야.
영희 (장난끼)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
교통사고처럼 그냥 길 가다 아무랑이나 부딪칠 수 있는게, 사랑이야.
사고나는데, 유부남이, 할아버지가, 홀아비가 무슨 상관이야.
나면 나는 거지.
성우 (쓴 웃음 밴, 천장 보며, 딴 생각)
영희 성우야, 엄마는 니가 현실에서 가능한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
보고 싶을 때 보고, 만지고 싶을 때 만지고,
그렇게 맘껏 욕심낼 수 있는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
성우 (딴 생각하며) 엄마... 오늘...나... 조금, 불안하다.
영희 (고개만 돌려, 성우 보는)
성우 (천천히) 나, 이대로 사는 게 뭔지, 기쁜 게 뭔지도 모르고
늙어버리는 건 아닐까. 얼굴도 마음도 윤기 없이 버석버석,
그냥 이대로 늙어버리면 어쩌나.
정말 늙었나봐, 이렇게 재미없는 생각이 다 들구...그지, 엄마?
영희 에미 앞에서 별소릴 다 해.
성우 ...눈물이 머리 끝까지 차 있는 것 같애.
엄마 내가 정말 슬픈게 뭔줄 알어?
..내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야.
정민이는 물론, (눈물 그렁해지며) 나 자신조차도.
배신이라면 배신인데, 아프지도 않고, 노엽지도 않고...
사실, 나 걔 별로 그립지도 않았어.
(눈물 주륵 나고, 짐짓 밝게 웃으려 애쓰며, 눈물 닦고)
엄마, 나 정말 왜 이러니...취했나봐..
# 4.
준희 성우 선배.
선배가 전에 그랬죠? 사랑 같은 건 없다고.
내가 한 말 기억하는지 모르겠어요.
나한테 사랑은 그 사람 땜에 잠 못자고, 가슴 설레고,
참 많이 아픈 거라고 했던 거...
성우 선밸 보면, 이상하게 내 맘이 참... 아퍼요.
(성우, 눈길 피하며, 웃으려 하지만 잘 안된다)
사랑이 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경험도 별로 없고...
그래서 성우 선배처럼 단정적으로 자신있게 말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는요.
성우 (가라앉은) 니 생각에는?
준희 내.. 생각에는...
(단호한) 사랑은, 있어요.
# 5.
성우 (창밖 보며, 편안하게) 오늘 아주 이쁜 부부를 봤다.
난 결혼하는거, 나 아닌 다른 사람 만나 사는 거,
그거 참 재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결혼한 친구들 보면서도 부럽기보단, 어떻게 비위맞추고 사나,
힘들겠다, 그랬었어.
영희 (성우 물끄러미 보는)
성우 (영희 안보고, 입가에 부러운 웃음 지으며)
근데 정말 이쁘게 사는 부부도 있더라.
여자가 남자를 보는데 (생각에 푹 빠진, 여전히 부러운 웃음 진)
어쩜 진짜, 황홀하드라. (자기 생각에 빠져 웃는)
영희 (차 마시며, 성우 보며) 그 남자가... 누군데...?
성우 (영희 안 보고, 찻잔만 보며) 남자?....친구?
(다시, 생각하고 다짐하듯)... 그래, 친구.
영희 (성우 놓치지 않고 보는, 무표정하게) ....
성우 (제 생각에 빠져) 그 친구를 보는, 여자를 보면서,
오랜만에 부러운...생각이 들었어.
나두, 누구한테 저런, 눈빛, 한번, 줄 수 있었으면.... (작게 한숨)
나두 누구한테 저런 눈빛 한 번 받아 봤으면.....
(영희 안보고, 작게 웃음 띤, 부끄러운, 짐짓 장난처럼)
엄마, 나.....사랑하고 싶다.
(하고, 차마시는데)
영희 (그런 성우 보는데, 가슴이 철렁한다.............)
성우 (베란다 틀에 몸 수그리고, 아래 내다보는, 눈뜨고, 꿈꾸는 사람 같다,
입가에 작고 선한 웃음 맑게 머금은 채)
영희 (성우 넋놓고, 보는, E) 지금.... 이 아이한테....무슨 일이.. 있다.
# 6.
성우 서준희.... 넌 사랑이 아픈거라 그랬지?
준희 (성우 보면)
성우 그건 사치야. (준희 못 보고, 마음 아픈)
나는 말이야. 너무 아파서, 하루에도 열두번씩 너무 아파서,
이젠 더 아프기 싫어.
사랑이 니가 말한 그런 거라면, 죽을때까지 안해도 좋아.
(눈가 그렁해지는 한숨 쉬고, 준희 보며, 편히 웃는)
오랜만에 너랑 잠시, 길을 걸으면서, 나 조금 행복했다.
준희 다행이네요. (담배 꺼, 옆에 놓고, 주머니 만지는)
성우 (그런 준희 보다, 감정 털어버리려 괜히 웃으며)
누가 보면 내가 너 꼬시는 줄 알겠다.
너, 주머니에 자꾸 손 넣고 만지는거 뭐니?
준희 (편하게 웃으며, 선인장 성우 손에 놓아준다)
성우 왠, 성인장?
준희 선물이예요.
성우 (선인장 보며) 이거 선물치곤, 너무 따갑고, 모나지 않았니?
준희 (성우 안보고, 입가에 웃음 띠고) 미국에 있을 때, 사막을 구경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나보다 더 큰 선인장을 봤어요.
그 때, 가이드가 그랬어요. 생긴 건 이래도
이 세상에 이 꽃처럼 여린 꽃은 없다...
성우 여려? 이렇게 독하게 가시까지 가진게?
준희 선인장 잘라봤어요? 선인장을 잘라보면, 온통 그 안에 물이예요.
눈물처럼 찝찔한 물이요.
성우 눈..물?
준희 그때부터 선인장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언제나 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
난, 성우 선배가 왠지,
..선인장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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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대사 하나하나는 사람의 가슴을 시리도록 찔러온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몸이 아프도록 공감하고, 그리고 슬퍼한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사랑도 해보지 않고서 이렇게 공감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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