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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이십사] 손민호, 『손민호의 문학터치 2.0』 본문
박민규, 이기호, 김애란, 윤성희, 한유주. 내게 있어 이 작가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바로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손민호의 문학터치' 기사를 통해 알게 되고, 읽고, 또 좋아하게 된 작가들이라는 것.
대학 시절, 밀란 쿤데라, 루이제 린저, 폴 오스터, 미셸 푸코 등 주로 해외 작가들의 작품을 즐겨 읽던 나는, 문학평론가 김미현 교수님의 '문학의 이해' 수업을 들으면서 스스로가 의외로 국내문학 작품을 별로 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로 은희경, 전경린, 신경숙, 김영하, 박민규, 정이현 등을 찾아 읽었고, 내 방 책장에는 해외문학보다 국내문학 책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문학의 이해’ 수업이 국내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면, ‘손민호의 문학터치’는 내가 좋아하는 한국 작가들을 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본격적으로 국내문학을 읽게 불을 붙여준 기사였다. 손민호 기자는 ‘한국문학은 어렵다’, ‘우울하다’ 라는 통상적인 관념을 깨부수고, 최근에 등장하고 있는 한국작가들이 얼마나 재기발랄하고, 발칙하고, 또 재미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중앙일보 연재 시절 한정된 지면과 ‘기자’로서의 객관성 유지를 위해 작가가 속으로 눌러 담았던 이야기들을 거침 없이 쏟아낸 새로운 글이다. “어딜 감히 문학을 터치하려 드느냐, 불경하다”며 놀림을 받곤 하는 제목처럼, 손민호 기자는 이 책에서 요즘의 젊은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그것도 쉽고, 재미있고, 또 요란스럽게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돌발 퀴즈 : 다음 소설가 중 외계인은?
① 박민규 ② 박형서 ③ 천명관 ④ 김태용
정답 및 풀이 : 객관식 문제에서 답을 모를 때 선배들이 전수한 필살비법에 의거해 정답은 ③이다. 까딱 잘못하면 ①을 고를 수 있겠으나 ①은 출제자가 파 놓은 함정이다. 박민규는 외계인 행세를 하는, 또는 외계인으로 위장한 지구인이다. 박민규의 정체는 선량하고 확실한, 한국의 가장이다. 앞으론 헷갈리지 마시길. 몇몇 상위권 학생이 ②를 고른 경우가 있는데 박형서는 ‘이단아’ 또는 ‘골 때리는 작가’를 물을 때의 정답이다. ④를 선택한 학생도, 문제의 취지를 잘못 파악한 경우다. 김태용은 ‘골치 아픈 작가’다.
천명관이 외계인이라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신 있게 주장하는가 하면, 자신의 기사 때문에 책이 안 팔리고 있으니 책임 지라고 한 권여선에게 내가 없는 말 했냐며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조목조목 증거를 들어 반박을 하기도 한다. 또한 술자리에서 만난 작가들의 모습과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 작가들에 대한 손민호 기자 개인의 느낌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시인과 시적 자아는 동일하지 않다. 시적 자아를 시인과 혼동하는 건 가장 낮은 수준의 시 읽기다.
나는 그러나, 이와 같이 생각한다. 시인과 시적 자아가 동일인이 아니란 주장은, 삼라만상이 명쾌하게 해석된다고 믿는 교과서 안에서만 성립한다.
시인이 시를 내다 놓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다. 시적 자아가 난데없는 얘기나 떠벌리는 건, 생면부지의 독자가 어려워서다. 가슴속 저 깊은 데까지 열어젖히기엔 아직 쑥스러운 게 남아 있어서다. 시가 난해할수록 시인은 망설이고 있는 거다. 대놓고 털어놓기엔 내심 겸연쩍어 부러 말을 돌리고 있는 거다. 상처가 깊을수록, 이젠 아물었다고 여겼던 옛 상처가 여태 시리고 저릴수록 시인은 제 흉터를 연방 가리고 있는 거다.
한때 나는 글을 통해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는 것을 매우 경계했던 적이 있다. 내가 쓴 글을 보고 제멋대로 머릿속으로 나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놓고서 그 잣대에 끼워 맞추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쓴 글 속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그의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된다고 본다.
자신에게 소설은 ‘에라이, 뿅!’이라는 이기호, 문학 평론가들의 ‘라깡대고 지젝거리는 소리들’은 적응이 안 된다는 천명관(손민호 기자도 그랬듯이, 나 역시 ‘라깡대고 지젝거리는’에서 정말 웃다가 쓰러졌다), 「좆까라, 마이싱이다!」라는 불경한 제목의 글에서 “누구에게나, 꼴린 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박민규. ‘21세기 젊은 문학에 관한 발칙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동시에 ‘21세기 젊은 작가에 관한 발칙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읽고 싶은 책 목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손민호 기자가 풀어놓는 작가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면, 그 작가의 작품을 적어도 1~2개씩은 꼭 읽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젊은 한국 작가들이 요즘 잘 나간다는 일본 대중작가보다 훨씬 통쾌하고 재미있다는 손민호 기자의 말에 동의하는 한 사람으로써,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가 풀어놓는 21세기 젊은 한국 작가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자연히 한국소설들도 읽고 싶어질 테니까.
YES24 도서팀 블로그 책방이십사 - '이 책에 꽂히다'
원문 : http://blog.yes24.com/document/1253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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