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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문학과 시대 - 베르나르 베르베르, 『나무』

pencilk 2004. 7. 5. 01:30
최근 한국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10위권 안에 드는 책들을 살펴보면 <나를 변화시키는 좋은 습관>, <설득의 실리학> 등 현실에 살아가는 데 유용한 처세술에 관한 실용서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띈다. 반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처럼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에세이도 있다. 이렇게 정반대의 성격을 띠는 책들이 동시에 10위권 안에 드는 현상은, 현실과 이상 중 어느 한 쪽을 확실히 건드려주는 책이 잘 팔린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베스트셀러들 중에는 이후에도 꾸준히 읽혀 고전으로 남을 책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단기간의 소위 ‘열풍’으로 끝을 맺게 마련이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들은 위대하고 좋은 책이기보다는 시대의 요구와 독자들의 욕망을 적절하게 충족시켜주는 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최근 적어도 한국 출판계에서는 나왔다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작가들이 있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베르나르 베르베르이다. 두 작가의 공통점은 요즘 시대의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도시적 감수성, 가벼움, 탈낭만화의 ‘쿨’한 사랑 이야기로 큰 인기를 끌었다.

베르베르의 작품들은 대부분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다. <나무>는 장편보다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덜한 단편집임에도 불구하고 14주 동안 1위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나무>의 단편들은 환상적이고 놀라운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스스로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물건들, 혈관과 장기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인간, 루이14세 시대로 바캉스를 떠난 관광객, 미래가 불러올 모든 가능성을 나무 모양의 계통도로 그려내 검토하는 가능성의 나무, 인간을 애완동물로 키우는 외계인 등 그의 상상력은 관습적인 사고방식을 뛰어넘는다.

그의 글은 이러한 뛰어난 상상력과 더불어 치밀한 과학적 분석과 추리소설과 같은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밑바탕에는 철학적 주제까지 깔고 있다. 20편의 단편들 대부분에서 인간은 훨씬 위대하고 커다란 어떤 존재의 관찰 대상이나 놀림감이 된다. 그의 데뷔작 <개미>에서는 아주 작고 미세한 곳에도 독립된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나무>에서는 인간세계가 인가보다 우월한 어떤 존재에게는 인간이 생각하는 개미의 세계처럼 한없이 작은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인간과 다른 존재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인류에 대한 외래적 시선’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존재와 의식 및 문명의 미숙함을 효과적으로 고발한다.

베스트셀러는 책이 출판된 ‘그 시대’에 많이 팔린 책이다. 그렇다면 <나무>를 비롯한 그의 책들이 많이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은 물리학, 생물학, 유전공학 등 과학적 지식에 의해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거기에 기발한 상상력과 철학적 주제까지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결코 어렵지 않다. 과학과 인간에 대한 호기심도 적절히 자극하면서 재미도 있고 부담스럽게 어렵지도 않다. 인생에 대한 성찰을 던지면서도 결코 무겁지 않다. 또한 <나무>에서는 단편이라는 것이 약점이 아니라 호흡이 짧아 속도감 있게 읽히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짧고 속도감 있는 ‘쿨’한 문체 역시 한몫 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베르베르의 책이 인기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문학은 경험의 문학이었다. 독재 정치, 민주화 운동 등 과거의 경험, 역사의 상처에 대한 회환 또는 그 과거를 잊었다는 죄책감을 이야기하는, 리얼리즘적 성격이 강한 문학이 대부분이었다. 감정이 범람하고 지나치게 뜨거웠다. 하지만 이제 독자들은 쿨한, 이른바 탈낭만적인 글을 원한다. 또한 경험이나 연륜보다는 정보나 지식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에 토대를 둔 전문적이고 매니아적인 글을 요구하고 있다. 베르베르의 인기는 이러한 독자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요즘 인터넷 검색 사이트들은 저마다 지식검색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지식검색 서비스의 원조격인 인터넷 한겨레의 ‘디비딕’은 <개미>에 등장하는 물음마당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이런 지식 검색 서비스들은 요즘 시대 젊은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정보에 대한 갈증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무>를 비롯한 베르베르의 글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요즘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글이 베스트셀러에서 그칠지, 앞으로도 꾸준히 읽혀 고전으로 남을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