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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문학과 사랑 - 은희경, 『타인에게 말 걸기』

pencilk 2004. 7. 5. 01:25
삶은 말 그대로 요지경이다. 모든 것은 불투명하고, 그리하여 사람들은 늘 발을 동동거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문학은 인생의 고됨과 동시에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사랑의 달콤함과 동시에 이별의 아픔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바로 인생이니 충분히 아파하라고 말한다.

모든 문학이 이야기하는 인생은 ‘사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타인에게 말 걸기>에서 은희경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결국은 사랑에 관한 것이다. 다만 ‘은희경식’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 사랑을 하고 싶은 자와 하고 싶지 않은 자 간의 소통의 단절. <타인에게 말 걸기>는 낭만적 사랑의 허상, 더 정확히는 타인과의 소통의 단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화자는 타인과 얽히고 관계를 맺는 것을 번거롭고 무의미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에게 편견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곧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함을 의미한다. 반면 여자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말을 건다. 그녀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어쩐지 사람을 질리게’ 한다. 몇 번 보지도 않은 자신에게 번번이 전화를 걸어 당황스러울 정도로 친한 척을 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그녀를 화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타인에게 말 걸기>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화자와 여자의 사이에는 사랑은커녕 기본적인 유대감조차 없다. 있다 해도 여자의 일방적인 것일 뿐이다. 여자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사랑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무시나 사랑 없는 섹스 끝에 정액과 함께 말라붙은 휴지를 이빨로 긁는 비참한 아침이다. 이처럼 <타인에게 말 걸기>는 근대적, 낭만적 사랑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더 근본적으로는 ‘자아와 타자 간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회의’에 대해 지적한다. 화자와 여자의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의 관계다. 그리고 여자는 화자가 냉정한 사람이어서 오히려 더 편하다고 말한다. <타인에게 말 걸기>는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현실을 정직하게 시인하려는 자세와 더불어 타인과의 소통에 집착하는 삶의 정형을 탈피하려는 충동을 드러낸다. 동시에 타인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야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나르시시즘을 보여준다.

이는 비단 <타인에게 말 걸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은희경의 소설 전반에 깔려있는 주제다. 90년대에 은희경의 소설이 많이 읽혀진 것은 그녀의 소설이 바로 현재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 부르짖던 낭만적 사랑과 함께 건조하고 계산적인 사랑이 공존하는 것이 바로 현대사회이다. 이제 ‘왜 사랑을 하는가’가 아닌 ‘왜 사랑을 할 수 없는가’가 문학의 주제가 된 것이다.

낭만적 사랑을 그린 문학에서 사람들은 대리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은희경의 글은 우리의 아픈 현실의 정곡을 치고 들어와 가슴에 와 박힌다. 사람들은 그녀의 글에 드러나는 스스로의 모습에 불편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것은 흔히 ‘농담과 위트의 수사학’, ‘가벼움의 서사’로 평가받는 은희경 소설의 근원에 진지함이나 순정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희경의 삶에 대한 농담과 가차 없는 폭로는 우리 사회를 조롱하고 있지만, 그녀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삶의 진지함이나 순정성일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말 걸기>는 타인과의 소통의 단절을 말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말을 걸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화자는 아닌 척 하고 있지만 그 역시 상처받을까봐 미리 피하는 것일 뿐이다. 사랑은 아름답거나 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것이다. 사랑은 허상이라는 은희경의 농담 속에는, 그렇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보다 진지한 사랑에 대한 진담이 숨어있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