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영화 비교 분석
-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영화 <프라하의 봄>
Ⅰ. 서론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영화 <프라하의 봄>은 1984년에 발표된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1988년에 제작된 영화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회귀 사상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 가벼움과 무거움,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운명 등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룬 책이다. 부분부분 드러나는 밀란 쿤데라의 생각들로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에세이 같다고 느껴질 정도다.
'프라하의 봄'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배경이기도 한, 소련의 침공으로 혼란에 빠져있었던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1968년에 일어난 자유 민주화 투쟁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필립 카우프만 감독은 제목을 <프라하의 봄>으로 바꾸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 줄리엣 비노쉬, 레나 올린을 주인공으로 하여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약 3시간에 달하는 장편 영화로 원작에 굉장히 충실하게 제작되어 국제비평가 협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개인적 성향 탓에 지나치게 개인적인 로맨스로 흐른 감이 없지 않다는 평을 받기도 했고, 실제로 원작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글로 포르노를 만들었다며 화를 냈다고도 한다.
하지만 다소 어렵고 난해하게 느껴지는 원작을 여러가지 영화 기법과 주인공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로 좀 더 관객들(또는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살 만하다. 또한 프라하의 멋스러운 정취와 함께 실감나게 보여지는 화면들과 체코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레오 야나체크의 음악은 영화의 색다른 묘미라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스토리는 같지만 필립 카우프만 감독이 원작 소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표현했는지 알아본다.
Ⅱ. 본론
영화 <프라하의 봄>은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모티브, 등장인물, 스토리, 시대적•사회적 배경 등 어느 한 부분도 고치지 않고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따라서 영화도 소설과 같이 1960, 70년대 러시아의 침공으로 혼란스러웠던 체코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라는 4명의 주인공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기본적인 스토리도 대부분 같지만 소설에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더 잘 표현되기도 하고, 영화이기에 소설에 비해 미숙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또 3시간이라는 다른 영화들에 비해서는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시간 제약으로 인해 생략된 부분도 있다.
1) 서술방식
먼저 영화와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서술방식, 즉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서술방식은 기존의 다른 소설들과 달리 굉장히 특이한 형태를 띄고 있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니체의 회귀 사상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문제 제기로 시작하는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체는 작가인 밀란 쿤데라이다. 하지만 기존 소설들이 사용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과는 다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작가는 불쑥불쑥 튀어나와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심지어는 자신이 주인공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끊임없이 이것은 소설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적인 서술방식의 하나이다. 또한 시간적 순서도 전혀 맞지 않다. 소설 속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고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다른 인물들의 관점에서 여러 번 보여주기도 한다.
반면 영화는 시간 순서에 맞게 스토리가 진행된다. 그래서 다소 산만하거나 이해하기 힘들 수 있는 원작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차분하게 정리해주는 듯한 느낌이다. 예를 들면 토마스가 정부가 강요하는 서명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유능한 외과의사에서 시골의 의사로, 또 다시 유리창 청소부로 전락하는 과정이 소설에서는 굉장히 띄엄띄엄, 그리고 뒤죽박죽으로 진행되는데 반해 영화에서는 한 번에 몰아서 그 과정을 보여주어 더 극적 효과를 낸다. 하지만 좀 빠르게 진행되는 감이 있어서 그것이 가지는 의미ㅡ역사와 사회 앞에서의 개인의 운명과 심오한 주제들ㅡ가 반감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에서는 영화 속에서도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갔던 주체와 같은 역할을 하는 나레이션이 나오긴 하지만 영화 전체를 통틀어 그 횟수가 굉장히 작다. 따라서 영화는 소설 속에서 작가가 했던 모든 심리 묘사를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토마스의 정부인 사비나는 자신과의 정사 중에 시계를 본 토마스를 곤란하게 하기 위해 그의 양말을 숨기는데, 이 때 토마스는 이것이 사비나의 복수임을 눈치 챈다. 영화 속의 이 장면에서 토마스는 사비나에게 테레사와 함께 사는 자신이 어리석어 보이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인생을 두 번 산다면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있지만 인생은 한 번 뿐이고 헛껍질 같은 것이어서 무엇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런 대사는 소설 속에서는 테레사가 프라하로 찾아왔을 때 토마스가 했던 생각으로, 영화로는 그의 내면의 생각을 이렇게 그의 대사로서 표현한 것이다.
2) 등장인물
영화 속 주인공들은 원작의 주인공들과 기본적으로는 자라온 배경도, 성격도, 이야기 속에서 하는 대사와 행동도 모두 똑같다. 하지만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만 본다면 이 주인공들 개개인이 갖고 있는 특성과 그들만의 매력을 훨씬 덜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쿤데라는 그들이 하는 생각 하나하나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그들의 어린 시절 배경을 통해 하나하나의 인물들에 개성과 매력을 흠씬 불어넣는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들의 외면적 행동들만을 따르고 있고, 앞에 언급했던 것처럼 그들의 생각을 대사로라도 표현해보려고 최대한 노력하긴 하지만, 시간 제약상 그들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는 모두 빠져 있다. 그리고 그 부분은 각자의 성격 형성에, 그리고 그 인물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원작에서 토마스는 테레사를 사랑하고 그녀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들과 sex를 한다. 사비나도 그의 정부들 중 하나다. 그에게 sex는 사랑과 별개의 것이고, 그것은 욕구 충족의 의미라기보다는 수많은 여자들에게 존재하는 백만분의 일의 상이성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소설은 첫머리에서 니체가 말한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우리의 삶은 한없이 가벼운 것이라며,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토마스는 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며 한없이 가볍고자 하지만 그것이 경박함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런 그의 생각들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외면적인 그의 가벼운 행동들만을 보여줄 뿐이다. 필립 카우프만 감독으로서는 최선을 다 해 어떻게든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라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은 느껴지지만 미세한 인물의 심리와 철학적 문제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한 영상의 한계가 드러난다.ㅡ이는 쿤데라의 글이 워낙 출중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테레사와 사비나의 경우는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생략됨으로써 인물의 매력이 꺾여버린 케이스다. 테레사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가벼움은 곧 경박함’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가벼움이 용납하기 힘든 것이고 그래서 토마스가 다른 여자들과 sex를 하는 것을ㅡ정확하게는 사랑과 sex가 별개일 수 있다는 것을ㅡ,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저 마지막쯤에 자신은 어머니를 억지로 사랑해야 했다는 대사 한 마디에서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유일하게 나올 뿐이다.
사비나의 경우는 테레사보다 더 심각하다. 사비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에 대한 어떤 설명보다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학창시절에 피카소를 멀리 하라는 아버지를 배반했고, 미술가가 되어서는 지도자의 얼굴을 그리라는 당의 지침을 배반했다. 배반의 순간은 언제나 그녀를 들뜨게 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 앞에 새로운 길이 열리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런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다. 다만 토마스와 자주 sex를 하고 자신의 애인이었던 프란츠가 자신 때문에 아내와 이혼을 하자 떠나버리는 모습 등으로 자유롭고 가볍다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토마스와 테레사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가 충격을 받고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에서 관객은 의아해진다. 영화에서 그려진 그녀의 이미지로만 생각했을 때는 그런 그녀의 모습은 왠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 그녀가 그렇게 충격을 받고 눈물까지 글썽였던 것은 단지 ‘가장 가까운 친구’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항상 배신을 반복하며 살아온 그녀에게 더 이상 배반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 그 공허가 그녀를 절대 고독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흙과 바위 아래에 묻힌 토마스와 테레사를 생각했다. 그들은 무거움의 상징 아래에서 죽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유골을 화장해서 뿌려달라는 유서를 작성했다. 그녀는 가벼움의 상징 아래에서 죽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만이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오랫동안 갈망했던 전체적인 가벼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런 모든 묘사가 생략되어 있고 따라서 너무나 매력적인 사비나의 캐릭터가 영화 속에서는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그저 가볍기만 한 인물로 그려진다.
3) 상징성을 띄는 소품들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유난히 무언가를 상징하는 소품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상징들은 거의 대부분 영화에도 옮겨지는데, 워낙 그 양이 방대한 데다 심오하거나 영상으로만은 표현하기 힘든 것들은 생략되기도 했다.
① 테레사와 토마스의 만남 - 6개의 우연의 연속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와 토마스의 첫만남에 대한 묘사는 굉장히 흥미롭다. 테레사는 이 만남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쿤데라는 그렇게 생각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기 합리화와 억지가 작용하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후에 토마스의 관점에서 떠올린 이 첫만남은 6개의 기이한 우연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것은 그 순간 거기 있었던 남자가 토마스가 아닌 다른 남자였어도 그녀는 그를 사랑했을 거라는ㅡ그 만남을 운명이라 믿었던 그녀마저도 말이다ㅡ 테레사의 말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반면 영화에서는 이러한 우연과 운명에 대한 성찰을 모두 표현하기 힘든 까닭에 원작에 드러난 표면적인 사건들만을 그대로 따른다.
- 베토벤의 4중주 ‘그래야만 한다’와 선인장
테레사가 까페에서 처음 토마스를 발견했을 때 그는 그 곳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 때 까페에는 베토벤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베토벤의 4중주였다. 이 음악은 후에 테레사가 제네바에서 토마스를 떠나 다시 프라하로 가버렸을 때 토마스가 그녀를 따라 프라하로 가는 데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바로 중주의 마지막 악장의 ‘그래야만 한다’라는 두 동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그 음악의 ‘그래야만 한다’라는 부분이 머리 속에 계속 맴돌고 왠지 자신은 테레사를 찾으러 가야만, ‘그래야만 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프라하로 간다. 소설에서는 악보까지 보여주며 이 부분의 토마스의 심리가 자세히 묘사되지만 영화에서는 테레사가 남기고 간 선인장 화분을 쳐다보는 것으로 대체한다. 선인장은 겉으로는 가시가 많고 날카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연약한, 또한 메마른 사막에서 살아가는, 즉 수많은 여성과 sex를 하는 토마스를 견뎌내며 살아야 했던 테레사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소설에 비해서는 효과가 조금 반감하는 묘사이지만, 영상으로 토마스의 심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선인장 화분이 테레사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안나 카레니나와 6이라는 숫자
처음 테레사가 토마스를 만났을 때 읽고 있었던 책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이다. 이 책은 그녀에게는 보잘 것 없는 시골 마을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그녀를 구별시켜주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았다. 또한 나중에 그녀가 토마스보다도 더 사랑했을지도 모르는 개 카레닌의 이름을 짓는 데에 이용되기도 한다.
원작에서는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언급이 따로 한 번 더 나온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기차에 치여 죽는 승무원을 보게 되고 결국엔 자신도 그렇게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쿤데라는 이러한 결말이 너무 작위적이라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실제로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필립 카우프만 감독은 이 부분을 부각시켜 영화의 마지막을 안나 카레니나의 결말처럼 쿤데라의 표현대로라면 작위적으로, 그렇게 암시적으로 맺는다. 토마스와 테레사는 인근 마을에 있는 술집에 가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에 돌아오다가 트럭의 브레이크가 고장나서 같은 순간에 죽는다. 이 때 영화에서 토마스와 테레사가 묵는 술집의 방 호수가 6호실이다. 바로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토마스가 묵었던, 그들을 이어준 6개의 우연 중의 하나인 ‘6’이라는 숫자인 것이다. (테레사와 토마스가 처음 만났을 때 토마스는 6호실에 묵고 있었고 테레사는 6시에 일이 끝났다. 테레사는 이 ‘6’이라는 숫자 역시 토마스와 자신을 이어주는 운명의 고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6호실에서 묵는다는 것은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 설정이다.ㅡ소설에서는 정확한 호수가 나오지 않는다.ㅡ 그렇게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6호실에 묵고 다음날 트럭 사고로 동시에 죽는다. ‘안나 카레니나’처럼 작위적인 결말일 수도 있으나 쿤데라의 말대로 그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영화에서 톨스토이의 책 ‘안나 카레니나’는 일종의 이러한 결말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② 중절모와 메피스토
사비나의 중절모는 원작에서나 영화에서나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중절모는 사비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것으로 그녀는 여러 번 이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다른 값나가는 물건들을 버리면서도 그 모자만은 버리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 중절모는 이 작품의 전체 주제를 함축하는 물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중절모는 원래 정장에 맞춰 쓰는 모자로 정중한 의미, 예의 등 ‘무거움’의 이미지다. 하지만 사비나가 속옷만 입은 채로 이 중절모를 쓰면 한 순간에 이 중절모는 굉장히 우스꽝스러워진다. 즉 가벼움이 되는 것이다. 사비나와 토마스는 이 중절모를 좋아하지만 프란츠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처럼 중절모는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상징하는 소품이다.
또 가벼움을 상징하는 소품으로는 메피스토라는 돼지가 있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의 이름을 가진 이 돼지는 돼지라는 동물적 특성으로 보나 이름으로 보나 단연 가벼움의 상징이다. 소설 속에서는 마지막에 테레사와 토마스가 시골에서 살게 되었을 때에서야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시작에서부터 종종 등장한다. 특히 영화에서는 토마스와 테레사의 결혼 장면에서 검은 넥타이까지 매고 참석한(?) 메피스트가 꿀꿀거리는 바람에 엄숙한 주례사를 듣고 있는 도중에 토마스와 테레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마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소설에는 없는 장면이다. 이 때 주례를 선 사람은 자신을 비웃는 거냐며 두 사람에게 화를 내고 진지하지 않다면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메피스토는 완벽한 가벼움의 상징이고 주인공들은 가벼움 쪽에 손을 든다.
4) 테레사의 꿈
원작에서 테레사의 심리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그녀의 꿈이다. 그녀의 꿈은 그녀의 무의식을 보여주고 이는 곧 그녀의 내면을 드러낸다. 테레사는 토마스가 여러 여자들과 자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질투하며, 그가 자신을 버릴까봐 언제나 두려움에 떤다. 그래서 그녀의 꿈은 수많은 여자들이 벌거벗고 나타나서 테레사를 죽이려고 하거나ㅡ그 때 그녀들에게 지휘를 하는 것은 바로 토마스이다ㅡ 토마스가 직접 테레사에게 죽으라고 하는 등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꿈은 그녀의 심리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꿈 얘기를 함으로써 토마스가 테레사에 대한 사랑을ㅡ어쩌면 연민 또는 동정을ㅡ 느끼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는 시간 제약상 원작에서만큼 테레사의 꿈이 많이 다뤄지지는 않는다. 꿈의 내용은 딱 한 번 나오는데 그마저도 원래의 내용을 굉장히 간추린 내용일 뿐이다. 이 점 역시 원작의 뛰어난 심리 묘사를 따라가지 못하는 영화의 안타까운 면이다.
5) 역사와 개인
필립 카우프만은 이 책을 영화로 만들면서 제목을 <프라하의 봄>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영화는 책보다 오히려 역사적 사건에 대한 비중은 낮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사회적 상황이나 역사에 대한 묘사보다는 개인적인 로맨스로 흐른 감이 강하다.
토마스는 잘못을 하고도 자신들이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러시아를 추종하는 정치가들을 외디푸스 신화에 빗대어 날카롭게 비판한다. 외디푸스는 모르고 했던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의 눈을 찌름으로써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자신이 잘못을 했다고 생각조차 않는다. 그는 이러한 점에 대해 술집에서 이야기를 꺼냈다가 기자들의 권유로 그 내용을 글로 쓰게 되는데, 이 하나의 글이 그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는다. 역사와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운명은 무참히 짓밟히고 마는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 러시아의 침공과 프라하의 자유 민주화 투쟁, 그리고 강압적인 진압의 현장을 영화에서는 생생한 영상으로 보여준다. 당연히 영상으로 보는 것이 소설로 보는 것보다 훨씬 실감난다. 또한 영화에서는 이 장면에서 조용하고 비장한 음악, 시계의 타종 소리, 허름한 거리 악사들의 바이올린 연주 등을 BGM으로 사용하고 컬러 화면과 흑백 화면을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장중함과 비통함을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주로 러시아군이 탱크를 몰고 총을 쏘면서 시민들을 진압하는 장면은 흑백화면으로 처리하고 시민들이 체코 국기와 여러 깃발을 들고 민주화 투쟁을 하는 장면은 컬러화면으로 처리함으로써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6) 가벼움과 무거움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가장 커다란 주제는 제목이나 책 속의 소제목들에서 드러나듯이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와 오해 등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테레사는 자신과 카레닌의 사랑이 토마스와의 사랑보다 낫다는 생각을 한다. 카레닌에 대한 테레사의 사랑은 질투를 하지도 않고, 보상을 바라거나 상대가 달라지기를 바라지도 않는 그런 사랑이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은 사람과 동물 간의 사랑보다도 못하다. 이 글은 사람들은 사랑이 무거운 것이라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사랑은 한없이 가벼운 것이며 죽음조차도, 인간의 존재 그 자체도 한없이 가벼운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춤을 추러 술집에 갔을 때 테레사는 토마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이 토마스를 시골로 오게 하였고 유능한 외과의사였던 그가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토마스가 자신이 늘 바라던 대로 시골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지도 못하고 또 이전보다 많이 늙었음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시간 순서에 따라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사비나가 편지로 받는 장면이 훨씬 먼저 나온다. 따라서 이것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 테레사와 토마스의 마지막 대화가 된다.
하지만 영화는 소설과 결말 부분이 다르다. 영화에서의 마지막 장면, 마지막 대화는 그들이 죽기 직전 트럭에서 나누는 대화이다. 그들은 그 전날 처음 만났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6호실’에서 잠을 잤고 더없이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테레사는 토마스에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고 토마스는 지금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그들은 행복한 웃음을 가득 띄운 채 끝이 없어 보이는 길을 달려간다.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만 그들은 얼마 후 고장난 브레이트로 인해 죽을 것이라는 관객들은 알고 있다.
소설의 결말이나 영화의 결말이나 결국 그렇게 행복했던 순간도 결국 짧게 끝남으로써 허무하고 쓸쓸함을 준다는 면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이 훨씬 더 로맨틱하고 해피 엔딩의 성격을 띠는 것이 사실이다. 이 역시 원작의 의도와는 맞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쿤데라의 원작이 말하고자 했던 가벼움과 무거움,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보다는 카우프만 감독 개인의 감성적 결말로 치우쳤다고 볼 수 있다.
Ⅲ. 결론
<프라하의 봄>은 문학을 원작으로 한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원작의 철학적인 주제나 밀란 쿤데라가 말하고자 했던 생각들보다는 피상적인 스토리를 따라가기에 급급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원작이 워낙 출중하기 때문에 카우프만 감독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사실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비교하지 않고 그냥 영화로서만 본다면 <프라하의 봄>은 굉장한 수작임에 틀림 없다.
심리를 위주로 한 소설을 영화로 만들 때는 언제나 혹평이 따라 붙게 마련이다. 이는 아무래도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문학보다 영상이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냉정과 열정 사이>의 경우도, 두 사람의 시점에서 각자 책 한 권이 나올 정도로 각자의 심리 묘사가 많았던 원작에 비해 영화는 그 특성상 남자 주인공인 준세이 한 사람의 시점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여주인공 아오이의 캐릭터가 많이 죽어버렸다. 그다지 무겁지 않은 연애 소설인 <냉정과 열정 사이>도 그랬는데, 제목과 달리 가벼움을 얘기하고 고민한다는 그 자체에서 한없이 ‘무거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로 만들었으니 원작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은 당연하다.
스티븐 킹의 소설처럼 스토리 위주이거나 환상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는 문학은 영화로 만들었을 때 오히려 더 빛을 발하지만 심리 위주의 문학은 영화화할 때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본다. 그런 문학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역시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는 편이 낫다. <프라하의 봄>을 보고 나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면 영화 <프라하의 봄>을 훨씬 더 즐거운 마음으로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원작과 비교했을 때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지만 영화만을 놓고 보면 <프라하의 봄>은 훌륭한 영화다.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와 프라하의 풍경, 레오 야나체크의 음악은 삼박자를 맞추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풍부한 영상미를 제공한다. 즉 원작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필립 카우프만식의 해석과 표현의 영화를 그 자체로 즐긴다면 훨씬 더 영화를 풍성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