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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루소, 인간불평등 기원론

pencilk 2004. 7. 5. 01:40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사회’로 보았다. 그리고 이를 모든 인간이 평등했던 원시부족사회를 통해 설명한다. 원시부족사회의 인간은 현대 문명사회의 문명인과 달리 자연에 의해 주어진 감각에 의해 사는, 인위인이 아닌 ‘자연인’이었다. 이 시기에는 선과 악의 구분도 없고 모든 인간이 평등했다. 루소는 이러한 원시부족단계의 인간을 현대 문명인의 눈으로 보고 ‘미개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그 시대의 인간들을 살피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본다. 즉 요즘 사람들의 눈에는 저속하고 미개하게만 보이는 원시부족사회의 인간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본질적인 인간의 모습이며,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의 인간들은 인간의 본성을 잃고 점점 더 불평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루소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에는 자기애와 동정심, 자존심이 있다. 자기애와 동정심은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인 반면 자존심은 사회에 의해 인위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 중에서 루소는 동정심이야말로 자연이 우리에게 준 유일한 미덕이라고 본다. 루소의 동정심은 맹자의 측은지심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맹자가 인간의 동정심만을 이야기했다면 루소는 동물과 동물 사이, 또는 자연 속에서의 동정심까지 모두 포함한다. 

현대의 문명인들은 원시부족단계의 인간들보다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모든 면에서 더 발달하고 성숙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감성에 따라 살아가는 원시인들의 삶은 수준이 낮으며 이성과 지식에 의해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이 옳다고 여긴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의 본성은 이성이 아닌 ‘동정심’이라고 본다. 인간은 누구나 동정심을 갖고 있으며, 동정심은 타인의 불행을 보았을 때 손상된 자기애를 다시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동정심에 의해 인류의 미덕이 탄생했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프랑소아 줄리앙은 루소의 동정심은 이타주의적인 동정심이지만 자신에게도 일어날 일일 때만 발생하기 때문에 결국 이기주의로 귀착된다며 맹자의 입장에서 루소를 비판했다. 하지만 이는 루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비판이다. 루소의 동정심은 ‘이기’ 혹은 ‘이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종호는 맹자의 성선설이 출척, 즉 두려워하는 마음을 놓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출척은 타인의 불행을 보았을 때 자신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즉 자기보존심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보존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이종호는 측은지심의 근저에 출척지심이 존재한다고 본다. 타인의 불행을 보고 측은지심을 갖는 것은 곧 그 근저에 자신도 같은 일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출척지심이 있기 때문이다. 성선설은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애정의 강도가 강해진다는 이타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여기서 맹자는 ‘나 자신’을 빠뜨리고 있다. 가장 가운데 원을 ‘나’로 두었을 때,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된다. 이는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기(利己)’와 동일한 것이다. 즉 맹자에 의해 간과된 ‘나’에 주목한다면 맹자의 성선설은 자신과 거리가 멀수록 애정의 강도가 반비례한다는 순자의 성악설과 일맥상통하게 된다.

서양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이기(利己)’냐 ‘이타(利他)’냐의 이분법은 의미가 없다. 루소의 동정심은 ‘나’를 버린 이타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즉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버린 이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소는 동정심을 통해 자기 자신 안에 타인을 담아 더욱 큰 ‘나’가 된다고 본다. 루소의 자아(我)의 개념 안에는 이미 이타(利他)가 들어있는 것이다. 루소의 동정심은 이기도 이타도 아닌 ‘위기(爲己)’이다. 나를 위한 ‘자기 보존’ 안에 이미 타인을 위한 것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루소가 주장하는 인간의 본성 중 자기애와 동정심은 얼핏 보기에는 상반되는 개념처럼 보이지만 근원적으로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둘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자기애와 동정심은 결코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며 둘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조화로운 일이다.

현대 사회는 동정심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동정심은 가끔씩 부딪히는 상황에 내면적으로 동화될 때 발생하기 쉽다. 하지만 현대 문명사회는 TV와 같은 매체의 발달과 여러 가지 기술의 발달로 인해 비참한 상황이나 장면들에 너무 자주 노출되기 때문에 이제 문명인들은 타인의 불행에 거의 무감각해졌다. 가끔 뉴스에 끔찍한 사건 사고 소식이 나오면 안쓰럽다는 감정은 생기지만 그것은 막연한 추리의 형태로 일어날 뿐이다. 문명인들은 이제 웬만한 뉴스에는 놀라지도 않고 타인의 불행에 진정으로 마음 아파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처럼 현대 문명인의 동정심은 뚜렷하지만 생생하지 않다. 반면 원시부족단계의 미개인들은 동정심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문명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다. 현대인들은 이런 인간의 본성인 동정심을 잃고 이성을 중시함으로써 점점 더 불평등해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 문명사회의 단계와 원시부족사회의 단계 사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불평등이 시작된 사건으로는 농업혁명과 야금혁명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농업혁명과 야금혁명이라 함은 그저 농업 기술의 발달, 또는 야금술의 발달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농업에 대한 기술이나 야금술은 이전에도 존재해왔다. 문제는 바로 이 농업 기술과 야금술이 ‘혁명’을 거쳐 제도적 형태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수급이 있으면 미래에 수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각오하는 인간’의 등장과, 지금까지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땅에 울타리를 치고 “나의 것”이라고 외친 인간의 등장, 즉 ‘소유’의 개념이 생기면서 ‘사유지’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사유지가 생기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자신의 토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기 시작했다. 이처럼 소유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자 토지를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 사이의 불평등도 심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야금혁명을 거치면서 무기의 발달과 함께 남의 땅을 차지하려는 싸움으로 이어진다. 더 많은 땅을 가진 사람들, 더 많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원인으로 소유물의 축적과 작은 사회의 형성을 들고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 두뇌의 성장과 반성의지의 발달이라 할 수 있다. 소유 개념이 발달함과 동시에 인간의 두뇌가 성장하면서 사람들은 보다 많은 지식을 얻었고, 점점 감성보다 이성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또한 반성 능력의 발달은 가진 자의 욕망과 가지지 않은 자의 원한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합리적인 규칙, 윤리, 도덕을 발생시켰다. 즉 즉자적 격률이 아닌 추리적 격률이 탄생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지식인 또는 현인(賢人)들이다. 이들은 참된 진리를 망쳐가며 도덕, 윤리 등을 만들어냈다. 장자는 “현인들이 없어져야 인․의․예․지가 회복된다”고 했는데, 이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맥락이 상통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인간들은 현인을 거치지 않고도 자신들 스스로도 충분히 진리를 추구할 수 있으며, 오히려 현인들이 없어져야만 참된 동정심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강한 반성능력을 갖고 있다. 현대인들은 반성능력을 올바른 것이라 생각하지만, 루소는 반성능력을 이익을 따지는 이성에 의해 생긴 것으로 본다. 반성이라는 인위적인 과정은 지난 일을 돌이켜보면서 한편으로는 손익을 계산하여 다시는 손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루소는 지식이나 반성이 남에 대한 자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반성능력과 이성의 발달은 상대적이고 인위적인 감정인 자존심을, 더 나아가서는 타인에게 존경받고 싶어 하는 허영심을 낳는데 이 허영심이야말로 인간의 뿌리 깊은 불평등의 근원이다. 

로크는 인간의 본성은 백지 상태라고 본다. 인간은 백지 상태 위에 겹겹이 지식을 쌓아가며, 지식인의 역할은 백지 상태의 인간의 본성 위에 지식을 쌓아 계몽시키는 것이라는 게 로크의 생각이다. 이에 루소는 그런 식의 생각이야말로 인간의 불평등을 야기 시킨다고 본다. 인간은 처음부터 평등한 존재이며 모두가 똑같은데, 누가 더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느냐에 따라 불평등이 야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인간은 수많은 지식을 갖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문명의 발달을 이룩하였고 더욱 더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믿어지고 있다. 또한 동물에 비해 여러모로 힘이 약한 인간을 신체적 한계로부터 해방시켜준 것도 지식의 힘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지식이 과연 인간을 진정으로 해방시켰는가, 또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었는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문제다. 루소는 동물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해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기 때문에 원시부족사회에서는 인간의 신체적 한계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본다. 오히려 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유의 개념이 등장하면서부터 이 신체적 한계가 진정한 불평등으로 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볍게 떠다니는 지식들로 인해 보다 더 근본적인 진리를 놓치고 있는 것이 현대 사회다. 현대의 문명인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으로 인해 더욱 편리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루소의 말대로 아무 것도 없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소박함 속에서의 행복을 찾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나 문명화되었고 이제 문명 없이는 하루도 살기가 힘들 것이다. 

지금까지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이성과 관념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루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물도 이성과 관념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신 루소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로 자유의지와 개선능력을 들었다. 자유의지란 자연에 협력하기도 하고 반항하기도 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말한다. 이는 인간의 영혼을 생성한다. 반면 개선능력은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얻게 해주었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많아 인간을 다른 동물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훨씬 더 빨리 늙게 한다. 따라서 루소는 개선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악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결국 앞서 말한 반성능력과 상통하는 것이다. 또한 자연 그대로 사는 것이 훨씬 이롭다는 자연의 정당성을 인간의 삶을 통해 입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성선설과 동정심, 그리고 자기 보존을 아우른다. 그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자기 충족적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나 역사, 지식 등에 의해 그 자기 충족적 삶이 훼손되고 인간이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악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선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 때의 사람들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기 충족적이었다. 하지만 원시부족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고 앞서 말했듯이 문명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현대 사회에서는 지식인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루소는 군자가 소인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식의 계몽주의와 지식인의 허영을 경계한다. 지식이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원시부족사회와 같이 지식이 없는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루소는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기 위해서 원시부족사회라고 하는 하나의 자연 상태를 가설적으로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기원’에 대해 고찰했다. 이는 진실성을 담보로 한 가설에 논리적 추론을 더한 것이므로 진리로서의 가치가 있다. 또 현대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칸트의 지적처럼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론이 아닌 ‘존재해야 하는’ 어떤 당위적인 것에 대한 이론이라는 점에서 이를 현실에서 활용할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