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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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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내 삶이 세월과 함께 단계적으로 나아져왔다고 생각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것이 그전보다 나았고, 이혼한 것이 결혼생활보다 나았고, 그 뒤로 그 시인과의 관계, 그 관계의 청산까지, 나는 조금씩 더 강해져왔어. 비록 나는 지금 이렇게 늙어가고 있지만, 이제는 내가 매우 강하다고 느껴."
에란디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왜냐면, 거짓말은 사람을 약하게 하니까. 마치 충치처럼 조금씩 조금씩 썩어가게 하니까. 세월이 흘러도 사람이 강해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런 경우겠지. 하지만 난 진실을 택했어."
2.
"사랑 없이는 고통뿐이라구."
"하지만 때로는" 하고 나는 반문했다. "사랑 그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나요?"
마흐무드는 생각에 잠겼다.
"아니지. 그렇지 않아."
그의 음성은 숙연했다.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지,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 사랑 그 자체는 그렇지 않아."
3.
코를 실룩거리던 재환 씨의 눈에서, 부케를 꼭 움켜쥔 미란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함께 떨어져 단상 아래로 흘렀다. 가족들의 눈물이 거기 한데 섞여 차올랐다. 콸콸콸 내 발목까지, 무릎까지 넘쳐오르더니 허벅지, 가슴까지 일렁였다.
기우뚱, 화분이 넘어졌다.
피아노가 옆으로 쓸려 누웠다.
목사님 앞에 놓인 마이크가 뒤집어졌다.
하객들이 한복 자락을 지느러미같이 흩날리며 천장으로, 천장으로 떠올랐다. 재환 씨는 아뿔사, 목발들을 놓치고 미란이의 손을 꼭 붙들었다. 미란이는 움켜쥐었던 부케를 내던지고 새신랑의 목을 끌어안았다. 헤엄을 못 치는 나는 그만 겁이 나서 물에 뜨는 목채 단상을 껴안았는데, 연미복과 흰 원피스를 입은 아이들이 바보, 바보, 하고 입술로 거품을 뿜어대며 내 머리 위로 지나갔다.
물끝으로 바다가 열렸다. 형형색색의 물고기 떼가 폭죽놀이처럼 떼지어 헤엄쳐 왔다. 팔다리를 개구리처럼 저어 앞으로 나아가는 목사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훨훨 저고리 고름을 날리며 나란히 날아가는 양가 어머니의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벌써 저 눈부신 푸른 물끝으로 부드럽게 헤엄쳐 가는 신랑의 구둣발이, 그의 손을 붙들고 흰 새처럼 날아가는 신부의 뒷모습이 아스라히 멀어져 갔다.
4.
그때 만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저마다 내심 나를 부러워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12월 24일 밤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24편을 예약해두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주일간의 산타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들은 드러내놓고 나를 부러워했다. 12월 24일이 하루하루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N의 한 선배는 아파트에 찾아와 차를 마시며 나에게 물었다.
"새벽에 도착한다구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24일의 12시 45분 비행기를 타면 밤새 태평양을 건너 날아가, 날짜 경계선을 지나, 26일의 새벽 6시에 김포공항에 닿을 예정이었다.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네, 6시예요." "새벽 6시라면, 아직 동트기 전이네요."
그는 망연히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5년째 고국에 들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은 여러 번 상상해봤거든요. 아직 캄캄한 김포공항 문을 빠져나와서, 택시를 타고 가겠죠. 88도로를 타고 강변으로……. 이숙영의 아침 방송이 나올까요?" 부끄럽다는 듯 그는 웃었다. 뒤끝이 쓸쓸한 웃음이었다. "그 느낌이 잊혀지질 않아요. 아침에 출근할 때, 겨울이면 아직 어둑어둑할 때 달리던 88도로, 유리창에 낀 성에, 이숙영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 같은 것들."
5.
모든 기억들이 단편으로 부서지고, 형태를 잃어간다. 조용히, 시간의 풍화 속에 흩어진다. 나는 흥얼거린다. 나는 기억하는 사람, 모두가 잊은 것들을 기억하는 사람,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을 때까지, 다만 그때까지.
내버려둔다. 새벽 안개가 습한 땅으로 내려앉듯이, 차창 밖으로 풍경들이 조용히 멀어지듯이, 내버려둔다. 애써 돌이킬 필요는 없다. 다만, 그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것들, 결코 완전히 펼쳐 보일 수 없는 것들…… 그 색채, 소리, 시간의 질감, 숱한 감정들, 조용히, 한없이 조용히 사라져가는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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